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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피로했을까”…시청역 앞 놓인 ‘숙취해소제’에 울컥

입력 | 2024-07-05 12:00:00

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역 역주행 사고 현장에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국화와 편지 등이 놓여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멀쩡히 살아계시던 분들이 이렇게 돌아가시다뇨. 너무 안타까워요. 가족분들도 얼마나 마음이 힘드실지….”

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역 역주행 사고 현장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던 70대 여성 노모 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같이 말했다. 노 씨는 “매일 이 길로 출퇴근한다. 사고 당일 저녁에도 이 길로 퇴근했다. 퇴근 후 사고 소식을 접하고 너무 놀랐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한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술을 따르고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사고 사흘째인 이날 오전에도 현장에 고인들을 추모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인근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50대 남성 김모 씨(가명)는 밤샘 근무 후 퇴근 전 추모 공간에 들렀다. 그는 동료와 함께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샀다. 또 다른 추모객이 남기고 간 아홉 개의 술잔 옆에 김 씨도 잔을 세웠다. 이어 한 잔씩 술을 따른 뒤 두 번 절을 올리고 묵념했다.

김 씨는 “정말 큰 사고여서 너무 충격적”이라며 “주변에서 일하는 공무원으로서 마음이 너무 안 좋길래 소주 한잔 푸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한 시민이 미리 준비해 온 꽃 한 송이로 헌화하고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사고 현장에는 수많은 국화와 추모 꽃다발이 놓였다. 바쁜 출근길에도 시민들은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묵념하거나 현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일부는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 여성은 미리 준비해 온 꽃 한 송이로 헌화한 뒤 자리를 떴다.

엄마와 함께 현장을 찾은 아이도 보였다. 아이는 쑥쓰러운듯 국화를 바닥에 두고 재빨리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는 흐느끼며 아이와 함께 한참 추모 공간을 응시했다.

엄마와 함께 사고 현장을 찾은 한 아이가 헌화하고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국화 옆에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술과 자양강장제, 커피, 음료, 과자 등이 수북했다. 사망자 9명이 서울시 공무원이나 시중은행에 다니던 직장인이라, 늘 업무로 피로했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품으로 보인다.

추모 현장에 국화와 비타민 음료, 죽 등이 놓여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추모 현장에 놓인 소주병에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못다 한 술 마저 하셔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소주병 옆에 컵라면이 놓여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초록색 소주병에는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못다 한 술 마저 하셔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있다. 컵라면과 숙취해소제도 눈에 띈다. 더는 아프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듯 한 켠에는 죽이 놓이기도 했다.

한 고등학생이 남긴 추모 쪽지.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근처 가드레일에는 한 고등학생이 남긴 추모 쪽지가 붙어있다. 학생은 “퇴근 후 밥 한 끼 먹고 돌아가던 길에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유명을 달리한 아홉 분의 명복을 빈다”며 “아빠와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사고 희생자의 지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도 보였다. “나야, 너무 아팠지. 너무 늦게 왔지”라며 “이승에서 고생 많았지, 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

추모 꽃다발 포장지에는 “소중한 아들, 최고의 남편, 자랑스러운 아빠, 든든한 형, 다정한 오빠, 기특한 동생, 따뜻한 친구이자 동료였을 고인분들께 온 마음을 다해 깊이 애도한다”며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과 고통을 잊고 행복한 순간만 간직하며 평안해지시길”이라고 타이핑한 A4용지가 붙어있다.

한 시민이 쓴 추모 쪽지.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한 시민이 작성한 추모 쪽지.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비타민 음료가 올려진 편지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분들의 가슴 속에 제 말이 어떻게 남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 차마 말을 길게 쓰지 못하겠다”며 “다만 이 사건에 참담함을 느낀다는 제 진심을 알아주시고, 하늘에서 푹 쉬시길 바란다”는 추모 글이 적혔다.

컵 커피 위에도 “성실히 살아오셨던 아홉 분을 지금 이곳 시청역, 그리고 우리가 기억할 것”이라며 “남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쪽지가 놓였다.

근처 직장에 다니는 30대 남성 황모 씨는 “추모 공간이 조성돼 있길래 마음이 쓰여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자주 지나가는 곳인데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게 충격적”이라며 “사고 원인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치권이나 정부에서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법이나 제도를 잘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추모 현장에 국화와 음료수 등이 놓여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앞서 지난 1일 오후 9시 26분경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호텔에서 빠져나온 제네시스 G80 차량이 세종대로18길 4차선 일방통행 도로를 빠르게 역주행하다 인도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9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경찰은 차량 운전자 차모 씨(68)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해 조사 중이다. 차 씨는 차량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