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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강유현]356년된 장수 독일 기업… 오너 가문의 4가지 원칙

입력 | 2024-07-04 23:12:00

강유현 산업1부 차장





2018년 5월 독일 과학기술기업 머크의 창립 3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축사를 마치자 창업자의 11대손인 프랑크 슈탕겐베르크하버캄프 가족위원회 당시 회장은 답사를 하며 “상속세를 좀 낮춰 달라”고 했다. ‘농담 반 진담 반’ 유머에 메르켈 전 총리를 포함한 참석자 900여 명 사이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사례를 보면 상속세는 13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머크에도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상속세 낼 돈을 마련하려고 주식을 팔다 보면 외부 경영권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상속세는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프랑스 등보다 엄격하지만 한국보다는 관대하다. 우선 최고세율이 30%로, 한국(50%)보다 낮다. ‘가업상속공제’를 통해 상속 후 수년간 지분을 보유하거나 고용을 유지하는 등 요건을 충족하면 세액을 일부 공제해 준다. 상속 규모가 클수록 공제폭이 줄어들지만, 한국처럼 애초부터 대기업을 대상에서 제외하진 않는다. 2021년 독일에서 가업상속공제 건수는 1만1874건, 금액으론 2조4760억 원에 달했다.

가족경영의 장점은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머크는 2004년 액정표시장치(LCD) 연구 100주년을 맞았다. 머크가 액정이라는 물성(物性)을 발견한 건 1904년, LCD 시장이 개화한 건 1990년대다. 그사이 머크는 제약 사업에서 번 돈으로 LCD 연구를 이어가며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한국 산업계엔 4대 경영까지 등장했다. 이들이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연구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승계 계획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상속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상속세 완화가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가족경영 기업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머크가(家)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3대를 내려오며 지분을 보유한 가족은 200명을 넘었다. 하지만 이들 중 18명만 가족위원회(13명)와 파트너위원회(5명)를 통해 전문경영인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경영에 관여한다. 대형 인수합병(M&A)이나 큰 틀의 전략을 바꾸는 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문경영인 결정에 맡긴다. 대신 두 위원회 회장은 최고경영진 5인과 함께 퇴사 후 5년까지 회사에 대해 무한책임을 진다.

오너가라고 해서 입사에 ‘프리패스’는 없다. 입사를 하려면 다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뒤 고위직급에 지원하는 방법뿐이며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가족위원회 회장은 75세가 정년이다.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려는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다.

슈탕겐베르크하버캄프 전 회장의 평소 자랑은 “200명이 넘는 머크 패밀리 중 슈퍼카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 슈탕겐베르크하버캄프 전 회장이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장수 비결인 “가족 구성원들 스스로 머크의 오너라고 생각하지 않고, 후대를 위해 신탁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혁신을 꿈꾸는 기업의 투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오너가의 진실성이 결합됐을 때 기업의 영속을 응원하기 위한 제도적 개편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강유현 산업1부 차장 yh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