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 여제’ 황경선의 발차기 모습.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딴 황경선은 한국 태권도의 전설적인 선수였다. 동아일보 DB
지난해 항저우 아시아경기에 코치로 참가했던 ‘태권도 여제’ 황경선(38)은 중국에 도착한 첫날 불시에 찾아온 대상포진 때문에 말 못 할 고통을 겪어야 했다.
큰 경기를 앞둔 선수들을 생각하면 아픈 티를 낼 수 없었다. 혼자 몰래 주사를 맞으며 버텼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선수들을 가르치고, 목소리 높여 선수들을 격려했다.
올림픽 세 대회 연속 메달을 획득한 박장순(레슬링), 황경선(가운데), 진종오(사격, 왼쪽부터)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아일보 DB
서울체고 3학년이던 2004년에는 한국 태권도 역사상 처음으로 고교생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그해 열린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냈다. 4년 뒤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출전하며 한국 태권도 사상 최초로 3연속 올림픽에 출전했고, 런던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이자 3연속 올림픽 메달 획득이었다.
어느 대회 하나 쉽지 않았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은 기적과 같았다. 태권도 여자 67kg에 출전한 그는 산드라 샤리치(크로아티아)와의 8강전에서 왼쪽 무릎을 크게 다쳤다. 경기 도중 왼쪽 무릎 안쪽에서 ‘뚝’ 소리가 나면서 엄청난 통증이 찾아왔다. 가까스로 경기를 마친 뒤 진찰을 받은 결과 무릎 인대가 거의 끊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은 4강전과 결승전은 더 힘들었다. 한창 경기 중일 때는 그나마 통증을 잊을 수 있었지만 몸이 식자 통증은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진통제를 복용하고 남은 경기에 나갔다.
황경선(오른쪽)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강력한 왼발 발차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체중 종목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체중 조절이다. 대개는 낮은 체급에서 시작해 나이가 들수록 체급을 올리곤 한다. 하지만 황경선은 선수 생활 내내 67k급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는 “나름대로 처절하고 혹독하게 몸 관리를 한 덕분인 것 같다. 선수 생활 내내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시간은 땀을 흘리자는 원칙을 세웠다”며 “휴가를 받았을 때도,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도 매일 한 시간씩 뛰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였기에 지난해 찾아온 대상포진은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파 보면서 그는 깨달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국가대표 코치로 일하는하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주 6일을 대표팀을 지도하는 한편 남은 하루는 모교인 한국체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러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황경선이 불암산 정상에 올라 V자를 그려 보고 있다. 황경선 제공
하지만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등산을 선택하게 됐다. 그는 “기구도 필요 없이 그냥 올라가면 되니까 쉽게 느껴졌다. 단순한 게 좋았다”며 “사실 골프도 해볼까 했지만 내게는 너무 정적인 운동이었다. 몇 달 배우다가 다시 등산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등산과 사랑에 빠진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가을 멋모르고 갔던 설악산 등반이었다. 등산 초보였던 그는 등산화나 트랙킹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정상을 올랐다. 그는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8시간 걸려서 겨우 정상을 찍었는데 내려올 때는 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했다. 발가락이 너무 아파 평지를 걷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생고생을 했지만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바라본 경치는 절경 그 자체였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맛에 산에 가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몸은 힘들었지만 단풍이 들기 전 초가을의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눈에 새기고 왔다”고 했다.
황경선이 설악산 흔들바위를 밀고 있다. 황경선 제공
그는 “산을 오르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무척 개운하다. 은퇴 후 살이 좀 쪘었는데 등산과 함께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몸이 한층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등산을 시작한 이후 감기 등 잔병치레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내 경우엔 장시간 등산보다는 왕복 3시간 정도의 가벼운 산행이 가장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경선이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부터 2012년 올림픽 여자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그는 향후 행정가의 일을 할지 아니면 지도자의 길을 걸을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다만 박사 학위를 딴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영어 배우기다. 그는 “세계태권도연맹(WT) 코치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일한 적이 있다. 선수와 지도자가 원하는 경기장 환경 등을 토론해서 결정하는 자리인데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너무 답답했다”며 “내 생각을 전하려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어학연수 등을 통해 몸으로 부딪치면서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등산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황경선이 태권도 준비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다. 이헌재 기자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