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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버림받은 북파공작원과 북한 ‘휴민트’

입력 | 2024-07-08 23:12:00

2002년 3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북파공작원의 실체 인정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가스통과 쇠파이프를 들고 시위를 벌인 북파특수공작동지회 회원들. 2002.03.15 원대연 기자 yeon@donga.com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한국에 온 직후 북파공작원 시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위가 과격해서가 아니었다.

북한에서 남파공작원은 거의 ‘신’급 예우를 받는다. 전사하면 자녀는 혁명가 유자녀 학원에 보내 간부로 키워지고, 가족도 죽을 때까지 국가가 보살핀다. 내가 살던 북한 마을에도 1960년대에 아들이 남파됐다 죽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명절마다 중앙에서 일반인은 구경도 못 할 남방과일이나 옷감 등이 선물로 전달됐다. 그런데 남쪽은 공작원들이 가스통을 들고 거리에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호 전 의원이 2022년에 낸 책 ‘북파공작원의 진실’에는 이들이 왜 가스통을 들고 나와야 했는지가 잘 설명돼 있다. 1951년부터 2002년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1273명. 이 가운데 7987명이 돌아오지 못했지만, 희생자 중 훈장을 받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훈장은 후방 사령관이나 장교들이 먼저 챙겼다. 북파공작에 뽑힌 고위층 자식도 전무했다.

공작원 모집 과정도 전부 사기였다. 많은 돈을 주고, 좋은 직장도 주고, 장교로 임명하겠다는 등 각종 감언이설이 동원됐다. 하지만 실제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었다.

특히 6·25전쟁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북파공작원은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었다. 살아 돌아오면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침투시켰다. 임무 중 죽으면 비밀도 지키고, 보상할 일도 없고, 지휘관은 훈장도 받을 수 있었다.

감언이설을 동원한 공작원 모집은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국가가 사기를 친 것이다. 2004년에야 ‘특수임무 유공자 보상법’이 제정돼 6000여 명의 북파공작원에게 평균 1억 원 남짓의 보상이 돌아갔다.

이제는 북한으로 공작원이 가진 않는다. 그 대신 21세기의 대북 첩보는 ‘휴민트’라고 불리는 포섭된 북한 사람이나 탈북민이 대신한다. 그럼 과거 공작원에게 사기를 쳐왔던 정보기관의 ‘전통’도 바뀌었을까.

몇 년 전 탈북해 서울에 정착한 북한 고위급 A 씨는 체제에 대한 불만을 안고 살던 중 해외에서 한국 정보기관에 포섭된 사례다. 배신을 막기 위해 태극기 앞에서 선서까지 시키고 사진을 찍어갔다. 모멸감이 들었지만 참았다. 중요한 비밀들을 정보기관에 제공하던 중 북한에 적발될 위기에 처한 그는 탈출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 보니 그에겐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그를 포섭할 때 했던 달콤한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지만 이마저도 불경기로 접어야 할 상황에 처해 이민을 알아보고 있다. 그의 바람은 단순하다. “한 달이라도 국가가 임명해주는 직책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뭐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언론에 노출된 외교관 2∼3명에게만 국책연구소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무슨 위원이란 직책을 받은 사람은 일부 있지만, 비상임직이어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북한에선 돈도 못 벌고, 규율생활을 해야 하는 외교관보단 해외에 파견돼 외화벌이나 무역업 등에 종사하는 직책의 인기가 더 높다. 또 북한의 각종 불법 행위에 대한 정보도 더 많이 안다. 하지만 이런 신분의 엘리트들은 서울에 오면 개밥에 도토리 신세로 전락해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제 대량 탈북 시대는 끝났다.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중 북한에서 곧바로 탈북해 온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결국 앞으로 북한 정보를 얻으려면 북한 해외 일꾼들을 포섭해야만 한다. 탈북해 한국에 올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도 이들이다.

그러나 외교관 이외에 어떠한 대우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굳이 위험한 일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북한에서 잘나갔고, 여기에서도 일반 탈북민에 비해 특별 대우를 받는 일이 혹자에게는 정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북 정보력을 키우려면 이들을 활용해야만 한다. 가령 대한민국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북한 고위 엘리트들을 모은 국책연구기관을 하나 만드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북파공작원 대신 북한 엘리트가 소모품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먼저 온 이들이 후배들에게 “우린 속았으니 너흰 절대 속지 말고 한국에 오지도 말라”고 한다면, 대통령이 7월 14일로 정한 ‘북한이탈주민의 날’에 어떤 말을 해도 그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