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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요’라는 말 대신[소소칼럼]

입력 | 2024-07-09 11:16:00


“진짜 확실한 것 같아요,”
라고 말하고 나는 또 멈칫했다.
얼마 전 조용하던 가족 카톡방에 알림이 떴다. 엄마가 혼자서 갑자기 발끈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같아요’ 라는 말 좀 그만 듣고 싶다!”
뒤따라 이번엔 아빠가 갑자기 링크를 하나 보냈다. ‘한국 간판’으로 명성을 날리는 운동선수의 소식을 알리는 뉴스였다. 경기 영상 뒤 이어진 인터뷰에서 선수는 총 네 문장을 말했다.

“많은 의심과 억측, 추측 이런 게 제일 힘들었던 시간인 것 같아요.”
“이제 ‘나는 자신 있다’라는 걸 더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제일 중요하고, 그게 올라왔다는 게 정말 긍정적인 것 같아요.”

부상을 털어내고 마침내 승리한 뒤 주먹을 들어 올리며 포효하는 모습에선 에너지가 폭발하듯 넘쳐흘렀다. 기량과 자신감은 분명히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선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지를 않았다.

“많은 의심과 억측이 제일 힘들었어요.”
“이제 나는 자신 있다는 것을 더 보여드리고 싶고요.”
“제일 중요한 자신감이 올라왔다는 게 정말 긍정적입니다.”

이리도 뛰어난데! 답답해하며 엄마는 덧붙였다. “본인은 의식을 못 하는 것 같아요.”

배드민턴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에 빛나는 ‘낭만파’ 안세영 선수가 지난달 2일(현지 시각) 세계배드민턴연맹 월드투어 슈퍼 750 싱가포르오픈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하며 환호하고 있다. 싱가포르=신화 뉴시스



‘자신 없음’을 ‘습관’이라 불러도 될까
습관적으로 자신이 없는 나는, 말끝마다 지독하게 따라붙는 “같다”를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다. 내 생각이 어떤 것 같은지 미루어 짐작할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를 잘 탐구하면 될 줄 알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은 점도 있긴 한데, 사실 저렇게 하는 편도 괜찮은 것 같아서 둘 중에 뭐가 더 좋을지는 좀 고르기 어려운 것 같아요.”

노력하면 할수록 되레 ‘분명함’에서 멀어져갔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오히려 점점 더 많은 “같다”를 입버릇처럼 끌어오고 있었다. 내 생각과 모든 제반 상황과 듣는 이에 대한 예의를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고 정확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라고 나는 매번 스스로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것이었다. 누구도 대놓고 강요한 적 없는데, 난 늘 이상할 만큼 방어에 필사적이었다. ‘내 의견은 이렇지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나조차도 분명치 않다’고. ‘그러니 당신 듣기엔 별로이더라도 지적하지 말아달라’며 한 발씩 물러서 왔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같다’로 점철된 선수의 인터뷰에서 나는 뜻밖에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언뜻 그럴듯하단 생각에 “진짜 확실한…”까지 뱉어놓고선 “네가 뭔데 확실하고 말고를 멋대로 판단해?”라는 공격을 받기 싫어 “… 것 같아요”라고 어물쩍 덧붙이면 내 딴에는 안전한 말하기가 완성되곤 했다.

언어에 천착해 온 신지영 교수(고려대 국어국문학과)는 전화로 나에게 조언 혹은 위로를 건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것 같다’ 라는 말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쓰지 말라고 과거에서부터 그렇게 지적을 받아왔는데도 버리지 못하거든요. 그 말이 의미가 아닌 태도를 담은 표현이라 그래요. 공손해야 하는 상황에선 누구든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공손하고 조심하기 위해 “같다”라고 말을 맺어버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습관은 말에 드러난다. 말은 다시 습관을 만든다.
“솔직히,”라는 말을 습관처럼 쓰는 사람을 나는 경계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은 ‘솔직함’으로 위장한 화살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라는 말로 습관처럼 입을 떼는 사람들을 만나면 물러서게 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대개 듣는 이를 아랑곳않는 내용일 때가 많아서다.

‘아니시에이팅’은 ‘아니’와 ‘이니시에이팅(공격 개시)’를 더한 말이다. 게임용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현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아니”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아니라 밀어내는 용수철이 되는 말이라고, 신지영 교수는 설명했다. 〈신지영 교수의 언어감수성 수업〉 발췌. 인플루엔셜 출판사.


말과 습관은 모순적 관계에 있는 걸까. “솔직히”라고 말할수록 타인의 솔직함을 의심하게 되고, “아니”라고 말문을 열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닫게 된다. 요즈음은 “같다”라는 말에서도 그 모순을 발견한다. 주눅들 때마다 덧붙였던 ‘같다’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턴 마침표이자 줄임표가 되어버렸다. 말끝을 흐릴 때마다 생각과 목소리도 덩달아 흐려짐을 나는 여실히 느꼈다.

그러다 문득 지난날 나눴던 그녀와의 대화가 기억 저편에서 반짝이며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봤던 기분을 헤어져 돌아오는 길 내내 아끼며 곱씹었던 날이다. 괜한 과장과 불필요한 추임새 대신, 느리고 친절한 목소리와 분명한 언어로 그녀는 마법처럼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풀어내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틀린 말은 족족 받아치겠다는 기색이라곤 없는 사람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겠다는 눈빛의 사람들. 그들의 곁에 머무는 동안은 나도 어쩐지 ‘같다’라는 방패 뒤에 마음을 감추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저는 사랑 타령 좋아하거든요!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낯간지럽고 형이상학적인 말도 어쩐지 그녀가 발성하자 빛을 머금은 듯 환하고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런 미소 앞에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라는 말로 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싶지 않아지기 마련이다.

“좋은 것 같아요” 대신 “저도 이 책에서 그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게 만드는, 그녀는 정말이지 곁에 머물며 닮아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말의 힘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