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아 파리 특파원
이달 초 나란히 총선을 끝낸 영국과 프랑스에선 중도좌파인 노동당, 극좌를 아우르는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 각각 승리했다. 두 집권당은 정치적 노선이 서로 다르지만 두 국가의 이번 선거에는 닮은 점이 있다. 오랜 세월 국가를 이끌었던 정통 보수 정당이 몰락했다는 점이다.
‘간판 후보’ 줄줄이 낙선, 극우에 구애
4일 총선을 치른 영국에선 14년간 집권했던 보수당이 직전 총선보다 의석수를 250석 넘게 잃었다. 1834년 창당 이후 190년 만에 존폐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게다가 보수당이 집권했던 14년간 총리들 중 네 명이 줄줄이 총선에서 낙선했다. 유권자들이 보수당의 ‘간판 후보’들을 투표로 엄중하게 심판한 셈이다. 윈스턴 처칠이나 마거릿 대처 등 영국이 자랑하는 총리를 배출한 보수당이 낙선 총리의 집합소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프랑스에선 두 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막판 반전 승리를 이뤄낸 NFP와 의석수가 직전 선거보다 두 배 넘게 늘어난 극우 국민연합(RN)에 가려진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있다. 보수 성향 공화당이 의석 45석으로 초라한 4위에 머문 점이다. 한때 의회의 변방에 있던 극우 RN 의석(143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적이다.
양국 보수 세력은 경쟁 정당에 비해 이념에 매몰돼 실용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점이 공통적인 패인으로 꼽힌다. 영국에선 진보 성향 노동당이 분배가 아닌 성장을 강조하고, 증세를 자제하는 등 사안에 따라 유연한 ‘우클릭’을 시도해 호응을 받았다. 보수당은 달랐다. 재무장관 출신으로 재정적자가 심각한 영국에 증세가 필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 법한 리시 수낵 전 총리는 보수 유권자를 의식해 기존의 감세 공약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프랑스 공화당도 갑자기 인기가 높아진 극우 RN과 연대하고 극우의 강성 발언을 좇으며 더욱 이념에 갇히는 모양새였다.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성향 르네상스에 보수 유권자들을 빼앗길 때부터 이념에 갇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지만 공화당은 변화하지 않았다.
변화 빠른 시대, 유연함 부족
현대 정치와 사회는 사안들이 워낙 빠르게 변화하고 문제 원인도 복합적이다. 단순히 이념에 매몰됐다간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요즘 프랑스에선 ‘드골주의자(드골의 정치사상 추종자)나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드물어지고, 평생 푸조나 르노 자동차만 고집하던 시절도 사라졌다’는 말이 나온다. 이제는 진영 논리를 고집하는 대신 기존 틀을 벗어나 타협하고 창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총리가 ‘지루하다’는 평가에 굴하지 않고 극단적이고 강경한 발언 없이 실용적인 정책을 앞세운 ‘순한 맛’ 캠페인을 이끈 점도 주목할 만하다. 경제와 안보 등 각종 위기가 산적한 상황에선 차분하고 침착하게 설득하는 리더의 언어가 강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