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아 삼성생명 배드민턴팀 감독(오른쪽)이 소속팀 안세영의 입간판에서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안세영은 파리올림픽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에 도전한다. 이헌재 기자
올림픽에 출전하는 건 모든 아마추어 운동선수들의 꿈이다. 올림픽 메달은 소수의 선수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특히 올림픽 금메달은 말 그대로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다.
‘배드민턴 전설’ 길영아 삼성생명 배드민턴팀 감독(54)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선수 시절을 보냈다. ‘복식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땄다. 4년 뒤인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여자 복식 은메달에 이어 혼합 복식 금메달까지 수확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무대인 올림픽에서 ‘금은동 컬렉션’을 완성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다.
배드민턴을 시작했을 때부터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올림픽 금메달은 그의 국제무대 은퇴 경기였던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 복식에서 나왔다.
길영아-김동문 조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혼합복식 정상에 올랐다. 동아일보 DB
김동문과 조를 이룬 혼합 복식은 원래는 ‘버리는 카드’였다. 길 감독은 여자 복식과 혼합 복식 등 두 종목에 나섰는데 체력이 달릴 수 있기에 메달이 더 유력한 여자 복식에 집중하라는 게 코칭스태프의 판단이었다. 더구나 혼합 복식에는 당대 최강이던 박주봉-나경민 조가 버티고 있었다.
코트 적응 삼아 편하게 뛴 혼합 복식 1, 2회전은 거의 무사통과였다. 이제 탈락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 단식 방수현의 경기와 함께 혼합 본식이 한국 TV 생중계 편성이 돼 버렸다. 이제는 죽기 살기로 뛸 수밖에 없었다. 길영아-김동문으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8강과 준결승을 넘어 결승에서 마주친 건 박주봉-나경민 조였다.
어차피 잃은 게 없던 길영아-김동문 조는 몸이 가벼웠다. 금메달이 눈앞에 보이던 박주봉-나경민 조가 오히려 긴장했다. 모든 이의 예상을 뒤집고 승자는 길영아-김동문 조였다. 길 감독은 “은메달 2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진정한 ‘해피엔딩’이 됐다”며 웃었다.
길영아(오른쪽)-장혜옥 조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우려했던 체력 문제는 전혀 없었다. “모든 코트의 기술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신조에 따라 체력 훈련을 누구보다 많이 해 놨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이란 종목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다. 배드민턴 라켓을 매고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가 “무슨 파리채를 들고 하는 운동이 다 있냐”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전신운동인 배드민턴을 잘하려면 스피드와 순발력, 지구력에 두뇌 플레이까지 능해야 한다. 그는 “운동을 하다 보면 누구나 힘들다. 하지만 쉬고 싶은 순간 다시 일어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는 것만큼 뿌듯한 게 없다”며 “(단식 금메달을 딴) 방수현도 그렇고 저도 그랬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운동하는 우리를 보고 주변에선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고 했다.
길영아 감독(왼쪽)이 딸 아영, 아들 원호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김원호는 파리 올림픽에서 모자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 길영아 감독 제공
누구보다 운동에 열심이었던 그는 1998년 삼성전기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트레이너로 9년, 코치로 5년을 일한 뒤 2011년부터는 여자팀 감독을 맡았다. 2015년부터는 총감독에 오르며 한국 배드민턴 사상 처음으로 남자팀까지 지도하는 여성 감독이 됐다.
그는 팀 창단 때부터 이 팀의 감독이 될 운명이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트레이너는 원래 없던 자리였는데 그를 위해서 새로 만들었다. 직함만 트레이너였지 실제로 훈련 스케줄을 짜고, 훈련을 시키는 것 모두 그의 역할이었다. 30년 가까이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선수 때는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지도자는 책임감이 무겁다. 눈앞의 대회를 바라보면서 한 해 한 해를 꾸준히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며 “사실 좋은 선수가 있어야 좋은 지도자도 있는 법이다.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길영아 감독의 일상 모습. 길영아 감독 제공
한국 배드민턴 대표팀은 26일(현지시간) 개막하는 파리올림픽에 12명이 출전한다. 그중 5명이 그가 지도하는 삼성생명 소속이다.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바라보는 안세영(22)도 그의 제자다.
친아들인 김원호(25)도 올림픽에 나간다. 정나은(화순군청)과 짝을 이뤄 혼합복식에서 모자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 길 감독은 “아들은 원래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체육관에 와서 배드민턴을 쳐 보더니 너무 재미있어하더라. 결국 운동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며 “이번 올림픽에서도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원호는 지난해 항저우 아시아경기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딸인 김아영(23) 역시 시흥시청에서 배드민턴 선수를 하고 있다.
길영아 감독이 지도하는 선수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길영아 감독 제공
처음 지도자가 됐을 때 길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함께 훈련을 하고, 함께 셔틀콕을 주고받으며 호흡했다.
하지만 감독직을 맡은 이후로는 더 이상 함께 훈련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못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젊을 때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운동을 한 탓에 무릎이나 발목 관절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처럼 배드민턴을 치면서 뛰는 게 더 이상 안 된다. 요즘은 선수들이 몸을 풀 때 가볍게 걷고 있다”고 말했다.
숨이 차오르는 운동을 하기 위해 그가 찾은 종목은 수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그는 수영장을 다니며 약해진 체력을 회복하려 애썼다. 그는 “처음엔 초급반으로 시작했다. 할수록 재미가 붙어 1년 정도 지나서는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등 4종목을 다 할 줄 알게 됐다”며 “개인적으로 수영은 평생 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숨이 헉헉 차오르게 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0살 가까운 나이에 배운 수영 덕분에 그는 버킷리스트도 하나 이뤘다. 해외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선수나 코치 시절 국제대회를 가서 보면 중국 선수들은 호텔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며 “내심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는데 짧게나마 수영을 배운 덕분에 나도 호텔 수영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수영장을 다닐 생각이다.
지난해 항정우 아시아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아들 김원호와 함께 공항에서 사진을 찍은 길영아 감독. 동아일보 DB
하지만 그의 마지막 꿈은 배드민턴 전용 체육관을 짓는 것이다. 그는 “이뤄질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체육관을 세워보고 싶다”며 “아들과 딸도 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면 코치 등으로 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길영아 감독이 행운의 네잎 크로버 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헌재 기자
배드민턴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동호인들이 즐기는 생활 스포츠 중 하나다. 길 감독은 동호인들에게 준비운동과 마무리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배드민턴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운동이지만 신체를 과격하게 움직여야 한다. 많은분들이 워밍업 없이 곧바로 경기를 하곤 하는 게 자칫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나고 나서도 마무리 운동을 해주는 게 좋다”고 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레슨을 받고 동반자와 함께 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기본기 없이는 실력이 잘 늘지 않는다. 꼭 레슨을 받을 것을 추천드린다”며 “이왕이면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좋다. 실력이 안 되는 상태에서 혼자 동호회 같은 델 가면 함께 어울리기 쉽지 않다. 좀 더 많은분들이 배드민턴의 재미를 느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