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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트럭’에 올라탄 그 청년, 유망한 프로축구 선수였다[따만사]

입력 | 2024-07-18 12:00:00

어머니 뇌출혈로 식물인간→해외리그 포기
운동 말고는 몰라…그만둔 후 현실 냉혹
현재 뷰티샵 운영하며 아이들 축구 지도





운전자 없이 질주하는 트럭을 따라가 올라탄 이 청년은 한때 그라운드를 누비던 프로축구선수였다. 몸에 배어 있던 그의 반사 신경이 이런 데서 튀어나올 줄은 예상 못했다.

세 달 전 경기 광주시 태전동의 학원가 비탈길에서 굴러 내려가는 1t 트럭을 세워 화제 됐던 ‘의인’ 이희성 씨(30)를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이 씨는 뷰티샵을 운영하고 있다. 사고 당시 골절됐던 발목은 깁스를 풀었지만 조금 불편한 모습이었다.

이 씨의 뷰티샵이 있는 건물은 학원이 즐비한 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다. 건물 바로 앞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도로가 150m가량 이어져 있고 그 길 끝에는 아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학원 건물이 정면으로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건 지난 4월 10일 오후 2시 50분경이다. 이 씨는 당시 잠시 허리도 펴고 커피도 한잔할 겸 건물 밖으로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탈길에 서 있던 1톤 트럭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붙으면서 적재함의 짐이 추락했고, 옆에는 60대 남성이 매달려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이 씨의 몸은 이미 트럭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고 떠올렸다.

이 씨가 트럭을 따라가 차를 세우는 모습. 채널A 갈무리


이 씨는 50여 미터를 달려 트럭을 따라잡았지만 하필 딱 그 지점 길가에 SUV 승용차가 서 있었다. 이 씨는 자칫 두 차량 사이에 낄 뻔했다. 위험천만한 상황. 다행히 트럭 창문은 열려있었고, 이 씨는 운전대 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이로 인해 방향이 살짝 틀어진 트럭은 SUV 범퍼를 스치면서 지나쳐 갔다. 이 씨는 다시 멀어진 트럭을 따라가 겨우 차문을 열고 몸을 욱여넣었다.

이 씨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며 차는 멈췄다. 뒤따라온 트럭기사는 피가 나고 있었다. 끌려오는 과정에 도로에 피부가 쓸린 것이다. 이 씨는 운전석에 오르려는 기사를 겨우 말리면서 트럭을 안전한 곳으로 대신 이동시켜주고 119를 불러줬다.

이때까지 이 씨는 본인이 더 크게 다친 사실을 몰랐다. 병원 검사결과 이 씨는 왼쪽 발목이 골절돼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발목이 돌아간 것이었다. 이 씨는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다친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두 차량도 스치면서 범퍼를 긁혔을 뿐 크게 파손되지는 않았다.

이 씨가 사고가 있었던 장소에서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이 씨는 “수시로 학원차가 다니는 곳이다. 특히 맞은편 건물은 학원이 많아 애가 튀어나왔으면 어쩔 뻔 했나 끔찍하더라. 차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의 20대는 시련…아픈 상처 있어”

이 씨가 자신의 뷰티샵 인근에서 기자와 만나 이야기 하고 있다.

현재 이 씨가 운영하는 매장은 ‘반영구 뷰티샵’. 사라진 눈썹을 살리는 일이다. 무엇보다 꼼꼼함을 요하는 직업이지만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이 씨의 원래 직업은 프로축구선수였다. 해외리그까지 진출한 유망주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한 이 씨는 17세 때 유럽으로 넘어가 당시는 독일 1부리그였던 본SC에 입단해 활동했다. 이후 튀르키예 오르두스포르 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등 활발한 해외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가족들과의 문자대화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 씨가 어머니에게 보낸 카톡의 답장이 ‘엄마 말투’가 아니었다.

이 씨는 “엄마 말투는 항상 ‘아들 뭐뭐 했니? 라고 ‘니’자로 끝나는데 아버지 말투였다”고 떠올렸다. 이상함을 느낀 이 씨는 다른 가족을 떠봤고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한창 전도유망한 아들에게 좌절감을 안길 수 없어 숨겨온 것이다. 이 씨는 “저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친척들에게 신신당부했는데 내게 걸렸다”고 말했다.


이희성 씨의 축구 선수 시절. 이 씨 제공


이 씨의 어머니는 4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까지 식물인간으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이 씨는 “어머니가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인지조차 못한다. 그냥 숨만 쉬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은 이 씨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이 씨는 한국에 돌아온 후 마음을 다잡고 FC오사카 등 일본 3부리그에서 뛰기도 했지만 우울증을 겪으며 좀처럼 컨디션을 예전처럼 끌어올리지 못했다. 결국 포천시민구단을 끝으로 24세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운동할 때 괜찮다가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우울증이 너무 심해졌어요.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니 몸도 건강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결국 그만뒀어요.”


우울증 이겨내고 다시…엄마에게 떳떳한 아들로
축구를 그만둔 후, 운동 말고 다른 일을 배운 적 없던 그에게 현실은 냉혹했다.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시련이 밀려왔다.

“축구장에서는 박수도 많이 받았고 누가 내 이름 불러주면 최고가 된 것처럼 생각했는데, 사회에 나왔더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많은 걸 느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나로선 남들보다 2배 3배 더 노력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애들도 가르쳐보고, 환경미화일도 해보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이희성 씨의 축구 선수 시절. 이 씨 제공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축구선수 출신 선배의 조언으로 현재의 일을 배우게 됐다. 올해 3년째 하고 있으며 나름 만족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실력 좋다고 소문도 나 있다.

이 씨는 힘들어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람 많은 곳에 가서 10분만 서 있어보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그래서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서 있어 봤는데, 나 말고 다들 치열하게 사는 거에요.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구나. 난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고 살았구나’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이 씨는 “내가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지 엄마도 자랑스러워 하시겠구나. 먼 훗날 떳떳하게 엄마를 만나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 후로 자연스럽게 우울증도 치료되고 단단해졌다고 회상했다.

이희성 씨가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지도하는 모습


이 씨는 평일에는 뷰티샵을 운영하지만 주말에는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 축구도 지도하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고 한다. 특히 뜻하지 않게 축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이겨나갈 수 있는 멘탈을 심어주려 노력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좋게 평가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제가 뭐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겠냐”며 “시간이 지나니까 그 일이 잘 기억도 안 난다. 이게 정말 대단한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며 웃어 보였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