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용 산업1부 차장
기술의 역사 속 큰 갈등은 ‘사다리 치우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 사다리에 먼저 오른 뒤 사다리를 걷어차 후발 주자를 막는 것이다. 뒷사람은 위를 바라만 볼 뿐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다리에 오른 사람은 아래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수만 년 전 송곳에 구멍을 뚫어 귀 달린 바늘을 만드는 기술은 호모사피엔스의 필살기였다. 이런 기술을 갖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멸종했다.
굳이 선사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한국은 지금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 핵무기 기술을 먼저 확보한 미국 소련(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핵클럽 국가들이 일찌감치 ‘핵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
196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핵확산금지조약(NPT)은 비핵보유국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금지했다. NPT가 전면에 내세운 것은 핵무기 위협 속에서 인류의 안전과 생존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당위 명제는 강력했다. 더 이상 ‘핵 사다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인공지능(AI)이 핵 사다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AI는 핵무기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기술로 꼽힌다. 이 기술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국가 발전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AI 사다리 치우기’ 조짐은 이미 나타났다. 유럽연합(EU)은 AI 규제 법률인 AI법을 8월 1일부터 정식 발효한다. 앞서 지난해 10월 미국도 조 바이든 대통령의 ‘AI 행정명령’을 통해 규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명분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AI로부터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규제의 명분은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현혹돼 이면에 숨은 뜻을 놓치면 안 된다. 규제로 인해 AI 사다리가 치워지고 있는 것이다. EU와 미국의 규제로 더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미국의 AI 선두 기업이 아니라 한국 등 국가에 있는 후발 기업이다.
한국 정부는 AI 진흥과 육성을 위해 AI기본법을 마련했다. 하지만 극심한 여야 대립 속에 지난 국회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22대 국회 재상정을 앞두고 있는데 논의가 산으로 간다는 우려가 나온다.
물론 AI가 초래할 사고를 막기 위해 규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AI 강국이 아니다. AI 사다리에 높이 오르지 못했다. 지금은 스스로 발목을 잡아 걷지 못하게 할 때가 아니라 서둘러 AI 사다리 위에 올라야 할 때다. 핵 사다리처럼 AI 사다리는 곧 치워진다. 아래에서 위만 바라봐야 하는 후회와 당면하게 될 생존의 위기는 핵무기 때보다 몇 배 더 클 수 있다.
김기용 산업1부 차장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