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 속 전력난에 고통받는 이집트 영업시간 제한으로 상점 피해 급증… 냉방기기는 물론 조리기구도 멈춰 극심한 고온에 온열 질환 사망 늘어… 양극화 심해지며 서민층 분노 커져 정부 “6개월 내 해결” 공언하지만… 이-헤즈볼라 전면전 시 악화 우려
8일 오후 10시경(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인근 나스르시티의 한 번화가. 정부의 야간 영업시간 축소 및 제한 정책으로 대다수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이집트 당국은 지난달 30일 국민의 전력 사용을 줄이기 위해 일부 식당, 필수 식료품점, 약국, 병원 등을 제외한 모든 상점의 평일 야간 운영 시간을 오후 10시까지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무더운 낮 시간대를 피해 주로 야간 쇼핑을 하는 이들로 북적이던 나스르시티의 여름 밤거리는 이날 오후 10시가 되자 차츰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사메흐 씨가 운영하는 옷가게 인근 카페의 종업원은 “손님이 제일 많은 밤에 영업을 막으면 돈을 벌지 말라는 얘기다. 6개월 안에 정부가 전력난을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 영업 제한, 순환 정전에 사망 사고까지
이집트 정부는 야간 영업시간 제한 정책을 내놓기 이전에는 필요할 때마다 ‘순환 정전(load-shedding)’을 시행했다. 지역별로 시간대를 나누고, 일일 3∼4시간씩 전력을 강제로 차단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부 발표와 달리 하루 3∼4시간보다 훨씬 긴 6시간씩 전력이 끊기는 날도 있다. 정전 시간 사전 공지도 제대로 안 지켜진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때때로 전기 없이 밤낮을 보내야 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부채나 작은 휴대용 선풍기에 의존한 채 가까스로 더위를 버티고 있다.
11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의 한 전통 식당. 이날 오후 기온이 40도를 넘는 더위에도 순환 정전으로 전력이 차단돼 냉방시설은 물론이고 일부 조리기구들도 작동을 멈췄다. 식당 관계자는 “요즘은 정전 시간이 불규칙적이라 더 힘들다”고 푸념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일부 쇼핑몰에서도 종종 정전이 발생하면서 손님과 직원들이 모두 우왕좌왕하는 일도 있다. 뉴카이로 지역의 한 쇼핑몰에서 식품 코너를 담당하는 직원 하마드 씨는 “정전 시간 동안 육류, 해산물이 상하지 않도록 요샌 얼음을 충분히 확보해 놓는 게 주 업무가 됐다”고 했다. 카이로 시내 한 아랍어학원에선 정전으로 실내 조명과 컴퓨터가 모두 꺼져 수업이 조기 종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단순히 생활 불편을 넘어 인명 피해까지도 발생했다. 지난달 초 이집트 북부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선 한 남성이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정전으로 건물 8∼9층 사이에서 멈췄다.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에서 홀로 탈출하려던 그는 결국 틈 사이로 추락해 숨졌다.
● “자국민보다 관광객들이 우선이냐”
지난달 25일 이집트의 무스타파 마드불리 총리는 TV 연설에서 전력난으로 인한 국민적 피해를 언급하며 이렇게 사과했다. 이어 국내 발전이나 송전에는 문제가 없으며 에너지 수입 차질, 외환 부족, 국제적 인플레이션 등이 전력난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집트 총리가 직접 나서 대국민 사과까지 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현재 이집트 정부가 시행 중인 전력 차단 및 순환 정전이 일부 최고급 호텔이나 외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시설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국민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중요한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0년째 택시 기사로 일하는 아이만 씨(56)는 “이집트 정부가 관광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다”면서도 “국민들에게 무조건적 고통 분담을 요구하며 일부 고급 시설에만 전력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아이만 씨는 평일 택시 운전을 위해 자신이 외부에 나와 있는 사이 부인과 자녀는 집에서 정전 시간 동안 더위를 버텨야 해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대학생 파라그 씨는 “정부는 항상 외부 상황만 탓한다”며 “정부가 제대로 전력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친정부 성향으로 유명했던 저널리스트 라미스 알하디디도 X에 “전기는 사치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누가 이 모든 것에 대해 국민에게 보상할 것이냐”며 정부를 저격하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스스로 전력 차단에 대비해야 하는 이들은 최근 중고 매물로 무중단전력공급장치(UPS)를 구매하고 있다. 컴퓨터 등 사무기기와 집 안 가전이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망가지지 않도록 하고, 업무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다. 프리랜서 여행가이드로 일하는 무함마드 씨는 “컴퓨터가 갑자기 꺼지면서 여러 문서 자료 등이 지워진 적이 있다. 젊은층에선 값싼 UPS 중고품이라도 구매하는 게 인기”라고 말했다.
● 이-헤즈볼라 분쟁 장기화 시 악화 우려
지난달 마드불리 총리는 순환 정전 계획 등을 발표할 당시 “이웃 국가에서 천연가스 공급이 갑자기 중단됐다”고 짧게 언급했다. 해당 국가는 이스라엘을 뜻하는데 이스라엘은 동부 지중해 타마르 유전의 천연가스를 2020년부터 이집트에 수출하고 있다. 이집트도 천연가스 생산국이지만 국내 공급을 충족할 만큼 생산하진 못하기에 이스라엘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이후 정세가 불안정해지며 에너지 수입에도 차질이 생겼다. 현재는 재개됐으나 이스라엘 에너지부는 해상에 위치한 천연가스전을 목표로 무장세력이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한때 생산 중단을 결정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집트 내에선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천연가스를 수입해 이스라엘 정부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에 대한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최근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전면전까지 각오하며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어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집트의 에너지 전문 매체 ‘이집트 가스&오일’은 “현재 양측은 더 큰 지역 내 분쟁과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일촉즉발의 긴장 국면”이라며 “국제 에너지 시장도 원유, 가스 생산 차질을 우려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