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신작 ‘전기 없는 마을’ 문명 발전 그 이후 존재의 의미 질문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은 전기가 끊긴 마을에 남은 존재들이 소멸과 순환, 그 굴레에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립극단 제공
과학 문명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세상, 전기가 끊기고 주민이 내몰린 마을은 적막했다. 폐타이어와 고철이 무덤처럼 쌓였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우리네 인생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 했던가, 무덤 사이로 주황색 꽃 세 송이가 돋았다. 인간도, 인공지능(AI)도 꽃의 곁에서 말한다. “산다는 건 참 귀찮은 일이야, 그래서 더 멋진 거지만.”
국립극단 신작 ‘전기 없는 마을’은 이처럼 문명의 발전 그 이후,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면서 전기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언뜻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펼쳐진다.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 세 이야기는 퍼즐처럼 맞물린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다양한 과학 개념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대사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작용과 반작용에 관한 뉴턴의 제3법칙을 접목한 대사는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러나 인류가 자연을 착취하고 기술 문명을 맹신한 데 업보를 치를 것이라는 일차원적 비관에 그치지는 않는다. 다중우주 세계관을 연출함으로써 기계, 자연 등 비(非)인간과 인간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할 가능성을 제시해 시각을 넓혔다.
군더더기 없는 무대 세트처럼 서사 구조도 명료하게 설계됐다. 공연 시간 80분을 가득 메운 과학기술 이론, 철학적 함의를 일부 놓치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순환하는 사건 구조, 등장인물 간 연쇄적 관계 등에 핵심 메시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해류를 타듯 자연스레 공연의 흐름을 따라간 끝엔 예측할 수 없어 고단한 우리네 삶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