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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상운]돌들뿐인 ‘의정부 터’ 복원… 상상력을 허하라

입력 | 2024-07-19 23:15:00

김상운 문화부 차장



“점점이 ‘돌들’뿐이라 황량하기만 하고,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 ‘의정부지 역사유적 광장’에서 만난 이모 씨(48)는 “여름휴가를 맞아 아이들과 경복궁 구경을 마치고 찾아왔는데 기대 이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위 외국인 관광객들도 영문으로 쓰인 입간판과 ‘돌들’을 쓱 훑어보고는 건너편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바빴다.

이들이 본 ‘돌들’은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 건물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춧돌 재현품이다. 조선시대 진짜 주춧돌은 복토된 잔디 아래 매립돼 있다. 서울시는 의정부 터에서 약 8년간 발굴조사 및 정비를 마치고 지난달 역사유적 광장을 공개했다.

그런데 1만1300㎡ 규모의 광장에는 주춧돌 재현품과 화장실, 벤치 몇 개가 전부다. 입구의 입간판에는 의정부의 역사적 연원 등만 기록돼 있을 뿐, 정작 이곳에서 살아 숨쉰 정도전이나 황희 정승 등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고건축이나 조선사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돌들만 보면서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기는 쉽지 않다.

조선시대 의정부는 단순한 국가기관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으뜸 궁궐(법궁)인 경복궁 정문(광화문)의 동쪽 첫 번째 자리에 둘 정도로 최고 행정기관의 위상을 지녔다. 무엇보다 의정부는 조선을 설계한 개혁가 정도전의 비전과 통치 철학을 응축하고 있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임금은 어리석을 수도 현명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임금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썼다. 왕조 국가임에도 1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의 혁명적 사상이 묻어난다. 그가 구상한 조선은 국왕의 만기친람을 막고, 재상들이 실질적 통치를 주도하는 나라였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통해 백성을 편케 하겠다는 고심의 산물이다.

이에 따라 행정 각부에 해당하는 육조(六曹)가 삼정승으로 구성된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는 구조가 정착됐다. 의정부는 왕명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육조로 하달되기 전 이의를 제기해 왕권을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과 세조가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왕이 육조에 직접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는 제도)를 시행해 의정부를 무력화시킨 이유다. 최근 과도하게 집중된 대통령실의 힘을 빼고 부처의 정책 리더십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뿌리에는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의정부의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선 주춧돌 몇 개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유산계 일각에서는 대안으로 공연이나 음악회, 토론회 등을 통해 의정부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집단지성으로 국정을 주도한 의정부의 의미를 살려 정책 토론회장을 두는 것도 방법이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건물 일부를 몸체까지 복원하거나, 경주 황룡사지처럼 유적 외곽에 전시관을 세우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유적 복토 후 주춧돌 재현품만 놓은 시 당국의 결정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유산 보존에만 치우쳐 활용을 등한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