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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퇴직자에게서 발견한 3가지 특징[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입력 | 2024-07-21 23:03:00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많은 사람이 퇴직 후에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얼마 전 선배를 통해 퇴직자 한 분을 만났다. 선배와 같은 동호회 소속으로 연세가 칠십 가까이 되는 분이었다. A 선생님이라는 그분은 폐수 처리 공장에서 30년간 일했고 회사를 나온 지는 3년이 되었다고 했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활기 넘쳤다. 음색은 투박했지만 한 점의 거침이 없었다. 악수를 청해 손을 잡는 데도 힘이 느껴졌다. 여태껏 내가 만난 비슷한 연령대 분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들은 선생님의 몇 년간 근황은 더욱 놀라웠다.

A 선생님이 다니셨던 직장은 하청받아 일하는 용역회사였다. 사장의 배려로 정년을 훌쩍 넘겨서까지 근무할 수 있었지만, 경영 상태가 나빠져 끝내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육십대 중반까지 일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한동안은 마실만 다녔는데 너무 무료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왠지 기운도 빠지는 듯하여 다시 일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궁리 끝에 찾은 곳이 인력사무소다. 하루 벌이 일임에도 시작하고 나니 점차 기분도 나아지고 몸도 가벼워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간 곳은 양계장으로 닭의 축사를 청소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고 한다. 심한 악취조차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였고 가족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며 껄껄 웃으셨다. 그렇게 공사판 인부를 포함해 여러 작업을 하시다가 소개소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근래 버젓한 회사에 들어가 정규직이 되었다고 한다.

A 선생님은 내내 신나 보이셨다. 중간중간 커다란 손짓도 흥을 돋우는 데 한몫했다. 어두운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남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A 선생님, 그분에게는 이제까지 만났던 퇴직자들과는 다른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깊은 주름 아래에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시원한 웃음은 물론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빛까지 나로서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대수롭지 않은 대화로도 즐거워하는 모습 같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주름 탓이 아니라 굳어가는 낯빛 때문인 듯했다. 자칫 어색하고 불편했을 자리가 변화무쌍한 A 선생님의 반응 덕에 생기 있어졌다.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둘째, 반소매 티셔츠 너머로 언뜻 보이는 잔근육이다. 흔히 보는 피트니스센터 광고 모델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관리하신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건강해 보이신다는 내 말에 일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운동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을 계속하여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짧게 자기관리라고 답하셨다. 당장 다음 날 출근해야 하니 서둘러 잠자리에 들게 되고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애쓴다고 하셨다. 만약 집에 있었다면 노상 술만 먹다가 고주망태가 되었을 거라며 농담도 건네셨다.

셋째, 더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시선이었다. A 선생님은 지난 얘기를 하지 않으셨다. 바로 현재 이야기를 하셨다. 아침에 동료에게 받은 연락, 어제저녁에 한 잔업 등. 흘러간 세월에는 관심이 없으신 듯했다. 펼쳐지지 않은 앞날에 흥미가 있었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옛날이야기만 입에 달고 사는 많은 퇴직자와 A 선생님의 가장 큰 차이였다.

A 선생님과 함께하는 동안 깊이 반성하였다. 퇴직 후 행복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터라 한층 더 그랬다. 신기하게 내 처지가 못마땅할수록 남들 눈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어서는 쓸데없는 공상과 짜증이 꼬리를 물었고 건강에 이상 신호도 나타났다. 그러다 자기 비관까지 하게 된 상황에서 선생님의 살아가시는 방식은 명쾌한 해법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A 선생님의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필시 하시는 일이 연봉이 많거나 그럴싸한 직분이어서는 아닌 것 같다. 사회적으로 보기에 선생님의 일은 선호도가 떨어지는 직종이었다. 그럼에도 흡족하게 여기시는 까닭은 선생님 자신만의 기준 때문이었다. 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주변 눈치 안 보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집중하는 자세가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것 같았다. 어쩌면 많은 퇴직자가 알고는 있지만 실제 행하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퇴직 후 삶은 전적으로 돈에 달려 있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나만의 그리고 나다운 행보,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까워질 수도 혹은 멀어질 수도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A 선생님을 통해 모든 퇴직자가 알았으면 좋겠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