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및 소극장 학전을 33년 동안 운영해 온 김민기 대표. 동아일보DB
자신의 히트곡 ‘상록수’처럼 30여 년간 작은 극장을 지킨 가수 겸 소극장 학전 대표 김민기 씨가 암 투병 끝에 21일 눈을 감았다. 향년 73세.
195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후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대표곡 ‘아침이슬’ ‘꽃 피우는 아이’ 등이 수록된 ‘김민기 1집’(1971년)은 고인의 데뷔음반이자 마지막 정규음반이다. 당대 20, 30대 젊은층에게 민중가요로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듬해 방송금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직접 쓴 시적인 가사는 당시 번안곡 위주이던 우리나라 포크 음악계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활동에도 제재가 이어졌지만 ‘상록수’ ‘공장의 불빛’ 등 노래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1990년대에는 공연 연출가로서 인생 2막을 열었다. 고인은 1991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훗날 대학로 공연문화의 상징이 된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다. 초기에는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 활용됐다. 아이돌 문화가 급속 확산하면서 설 곳이 사라진 가수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며 오늘날 인디밴드 공연문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시인과 촌장, 동물원, 유재하, 나윤선 등이 학전을 거쳐 갔고 고(故) 김광석은 1991∼1995년 매년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극장 입구에는 김광석을 추모하고자 세워진 ‘김광석 노래비’가 1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인은 척박해진 대학로에서도 추수를 내다보는 못자리로서 자리를 지켰다. 1991년 개관 당시 임대료, 설비비 등 재원을 마련하려다 매일 병원 신세를 지고, 극장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22년 만에 신보(1993년)를 내는 등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나 다른 소극장과 마찬가지로 관객 감소 등 경영상 어려움이 이어지며 학전은 올해 3월 문을 연 지 꼭 33년 만에 폐관했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주도로 이달 17일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으로 재개관했다.
고인은 위암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해 어린이극 ‘고추장 떡볶이’ 등 공연을 올리는 데 매진했다. 동아연극상 작품상(1999년) 한국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2018년) 호암문화재단 호암상 예술상(2020년) 등을 수상했다.
학전 개관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상록수)라는 가사처럼 생전 꼭 닮은 궤적을 남기며 이렇게 말했다. “기존 노선은 따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저 나일뿐입니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미영 씨, 장남 김종화 씨, 차남 김소윤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4일 오전 8시. 02-2072-2010.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