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지지 기반인 ‘심층국가’ 음모론 피격 사건으로 음모론이 현실화 힘 얻어 민주주의 시험대… 韓 정치에도 레슨 되길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상상력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길을 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언행이 항상 파격이라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13일 유세 도중 본인이 총격 사건의 피해자가 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 또한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미국 대통령 선거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건 이번 선거를 규정짓는 것은 피격 직후 촬영된 트럼프의 사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얼굴에 선연한 핏자국을 그대로 달고서 트럼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무엇인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배경에는 성조기가 펄럭이고 서너 명의 경호원들은 트럼프를 경호한다기보다는 그에게 매달리면서 말리고 있다. 십자군 원정에 나서던 사자왕 리처드가 만약 사진을 남겼다면 이런 장면이 아니었을까. 우연찮게도 트럼프가 외친 말은 “Fight, Fight, Fight!”였다.
2016년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수많은 정치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질문은 어떻게 트럼프가 그토록 열광적인 지지를 모으고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피격 직후 트럼프가 보여준 모습은 어쩌면 그 비밀의 이면을 엿볼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2021년 미국 의사당 점거 폭동은 심층국가가 벌인 선거 조작에 대항하는 필연적인 전쟁의 과정이었으며, 트럼프 피격도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인 투쟁의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피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사소한’ 도덕과 규범, 심지어는 법질서를 넘어서는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 말이다. 그 지도자야말로 내 삶의 고단함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웅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당 사진에 포착된 것은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지도자의 구현이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크나큰 역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위의 세계관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음모론이 그러한 것처럼,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스꽝스러운 “아무 말 대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소수는 항상 있어 왔고, 다수의 정치인 민주주의가 굳이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아무 일 하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치유”와 “미국 영혼의 회복”을 끊임없이 이야기해 온 것은 이런 맥락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 “아무 말 대잔치”가 현실의 힘을 획득하고, 지속·증폭된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특히 이것이 폭력으로 구체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민병대(militia)의 전통과 꺾일 줄 모르는 총기 소유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트럼프가 3월부터 언급하기를 자신이 당선되지 않는다면 “피바다(bloodbath)”가 될 것이라 경고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소문이 언제든지 현실의 피와 폭력으로 구체화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리고 트럼프에게 발사된 한 발의 총탄은 이런 소문을 현실화시켰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피격 사건은 그것이 누가 어떤 동기로 행한 것이건 미국의 민주주의를 빠져나오기 힘든 위기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미 대선 후보로 선출된 현직 대통령인 바이든이 전당대회를 불과 한 달 남겨두고 전례 없이 사퇴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다. 상대방이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혹은 트럼프가 피격만 당하지 않았다면, 혹은 바이든이 몇 살만 젊었다면 미국 민주당이 이렇게 뒤늦게 무리한 후보자 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전쟁을 결국 미국 정치는 치르게 된 것이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