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국제부 차장
“때아닌 ‘죽음의 블루스크린(Blue Screen Of Death)’이 Y2K(2000년)의 공포를 현실화했다.”(영국 파이낸셜타임스)
1990년대만 해도 익숙했다. 뜬금없이 컴퓨터 화면이 파래지며 먹통이 됐다. 보통 껐다 켜면 나아졌지만, 답답한 마음에 본체를 탕탕 두드리기도 했다. 그 시절, 2000년이 도래하면 온 세상 컴퓨터가 멈춘다는 ‘밀레니엄 버그’는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다. 별일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지만.
19일(현지 시간) ‘글로벌 IT(정보기술) 대란’은 서구 사회에선 Y2K가 떠오를 정도로 충격이 컸다. 미국의 한 보안업체가 업데이트 한 번 잘못한 게 세계 곳곳의 전산 장애를 초래한 광경은,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장밋빛만 품은 게 아니란 걸 일깨웠다. 무엇보다 병원과 공항, 카페 등에서 벌어진 혼란은 우리 일상이 너무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사태로 경제적 손실만 “10억 달러(약 1조3900억 원) 이상”(미 CNN)이라 한다.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에 뒤처진 ‘노후화’ 때문이었다. 예산 부족으로 낡은 전산 시스템을 그대로 쓰다 보니, 이번 최신 업데이트 대상조차 되질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교통국은 “우리 시스템은 인터넷도 연결돼 있지 않다”고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별 피해를 보지 않은 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의 역설’이 작용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등을 시행한 뒤, 중국 국무원이 해외 소프트웨어를 자국 제품으로 교체하도록 한 덕분”이라고 전했다. 영 BBC방송에 따르면 러시아 역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국제사회와 단절돼 불가피하게 대체 시스템 개발에 주력해왔다. 서방 제재에 가로막혀 글로벌 서비스에서 배제된 게 오히려 이득이 된 셈이다.
지난달 이코노미스트는 ‘왜 여행안내서는 사라지지 않는가’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 도태될 듯 보였던 여행 서적이 여전히 많이 팔리는 현상을 짚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사람들은 인터넷이 불가능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확실성(authenticity)’을 필요로 한다”며 “믿을 만한(trusty) 도구는 어느 시대건 돈을 지불할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여행안내서의 인기는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기술의 진보는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낙후된 설비와 폐쇄적 독재국가가 한번 요행을 누렸다고 정체나 퇴보가 정답일 리도 없다. 다만 서둘러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다. 천천히 가더라도 기본을 버려선 안 된다. 변수에 대비하지 않고 대세만 좇다간 ‘죽음의 블루스크린’ 다음 차례는 우리일 수 있다. 뒤늦게 컴퓨터를 때려본들 손만 아플 뿐이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