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르지’ 국내외 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전국 곳곳에 이른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지난달 19일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한 시민이 얼린 생수통을 머리에 올리고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대구=뉴시스
더위는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더위는 사람을 지치고 아프게 만들 뿐 아니라, 사납고 예민하고 멍하게 만듭니다. 날씨가 덥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화내고 실수하는 것이 정당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현상이 단순히 우리의 인내심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학술적 연구로도 점점 더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더위가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결과들을 모아서 소개합니다.
더위는 하버드생도 멍하게 만든다
2016년 7월, 낮 기온이 닷새 연속 33도를 웃돌던 미국 메사추세츠 보스턴에는 몇몇 불쌍한 하버드대생들이 살았습니다. 중앙냉방장치를 갖춘 신관 기숙사에서 사는 운 좋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에어컨이 없는 1930~1950년대식 구관 기숙사에도 사람이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들 스무살 전후의 건강한 젊은이인 데다 더위에 익숙해진 만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결과는 좀 의외였습니다. 26도의 열대야를 에어컨 없이 견딘 학생들은 21도 냉방 속에서 숙면한 학생들보다 점수가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반응 시간은 13.4% 느렸고, 덧셈 뺄셈 점수도 13.3% 낮았습니다.
더위가 절정에 달한 그해 7월 16일, 에어컨 없는 구관 기숙사의 실내온도는 섭씨 30도를 찍고야 말았습니다. 반면 신관 기숙사의 기온은 20도 초반으로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사진출처 ‘2016년 여름 냉방시설 없는 건물 거주자들의 폭염 중 인지기능 저하’ 연구논문
폭염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다들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과 만성 질환자에겐 심장마비와 사망 위험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더위는 우리의 심혈관과 땀구멍뿐 아니라 두뇌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가혹한(?) 생체실험을 진행한 세데뇨 박사는 현재 미 뉴저지주 럿거스대 공중보건대의 조교수가 돼서 실내환경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찜통 교실’, 시험성적을 넘어 인생을 바꿀 수도
한여름 더위야 한철 참으면 지나가는 것 아니냐고요?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폭염으로 인한 두뇌 기능 저하는 어쩌면 학생들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사진출처 박지성 교수 홈페이지
펜실베이니아대 환경노동경제학자 박지성 교수는 더위와 성적의 상관관계를 살펴봤습니다. 전국 고등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표준화한 뒤 시험 당일의 기온과 연관성을 분석한 것입니다. 교실온도가 22도 이상일 경우, 온도가 1도 오를 때마다 점수는 약 0.36%씩 떨어졌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얼마 안 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곱하기 10을 한다면 어떨까요? 32도가 넘는 날 에어컨 없는 찜통 교실에서 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들에겐 결코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기온이 올라가면 국내총생산(GDP)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는 계속 나오는데, 그 둘의 정확한 연결고리가 궁금하더라고요. 농업 국가라면 생산량이 떨어지니 그럴 수 있는데, 경제구조랑 상관없이 모든 나라에서 그런 결과가 나오니까요.”
14일 이탈리아 로마의 분수대에서 한 부모가 더위에 지친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려주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성인보다 몸이 작고 체온 조절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폭염에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로마=신화 뉴시스
열이 우리를 공격적으로 만드는 이유
더위는 공격성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더운 날에는 살인, 폭행, 가정 폭력 사건이 더 많이 발생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증오 표현이 늘어나고, 도로에서는 경적 소리가 더 많이 들립니다. 2019년 이뤄진 한 실험에서는 더운 방과 시원한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디오 게임기를 쥐여줬습니다. 결론은, 더운 방에 있던 사람들이 더 악의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이를 더 적대적으로 해석해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미 뉴욕타임스(NYT)는 설명했습니다.
워싱턴주립대 심리학과 킴벌리 메이든바우어 교수는 더위가 ‘자기 통제력’을 끌어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료들과 2022년 5~9월 시카고 주민 382명을 조사했습니다. 주민들은 더울수록 화와 욕이 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충동성도 함께 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충동은 약물 남용이나 자해 같은 위험한 행동이나 공격성을 촉발할 가능성도 높입니다. 충동성은 더위가 가신 뒤에도 꽤 지속됐습니다.
외부 환경이 가혹해질수록 인간은 생존을 위해 좀 더 본능에 치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25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의 호랑이가 얼음 특식을 먹는 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과천=뉴시스
에어컨만 틀면 다 해결되냐고요?
하버드대 기숙사 실험에서도, 공격적 비디오게임 실험에서도, 많은 연구자가 내놓는 가장 중요하고 급한 대응방안은 어떻게든 몸을 식히는 것입니다. 에어컨을 틀고, 그게 어렵다면 선풍기를 틀고,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라는 뻔한 얘기죠. 사진 속 남자가 마시는 음료는 맥주처럼 보이지만 아이스티입니다. 더위로 탈수가 일어날 때에 술을 마시면 오히려 체온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바그다드=신화 뉴시스
각 가구들이 에어컨을 마련할 여력이 없는 저소득 지역이라면 천막 그늘이나 나무가 우거진 공원, 실내 더위 쉼터 등이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NYT는 “당연한 소리지만, 당신의 기분과 인지력을 결정하는 건 날씨 자체가 아니라 체온”이라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을 결론으로 성급하게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박지성 교수도 사람들에게서 “그러니까 결론은 학교에 에어컨을 설치하라는 얘기냐”라는 반응을 수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에어컨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에어컨은 시작이어야 한다고, 거기에서 그쳐버리면 안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박 교수의 제안으로 이 기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화석연료가 아니라 청정에너지로 전기를 만든다면 저는 에어컨은 사람의 건강과 편리, 생산성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도 굉장히 많을 거예요. 너무 낡아서 비효율적인 건물들의 구조를 손본다든지요. 에너지 수요를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 냉방 수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획기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기록한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횡단보도에서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 모여 햇빛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늘막과 녹지, 냉방 효율적인 건물설계 등 다양한 대응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기후변화 시대의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존법 아닐까요? 뉴스1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