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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어느날 엄마가 부탁했다, 인간답게 떠나고 싶다고

입력 | 2024-07-27 01:40:00

대만 한 의사가 쓴 ‘가족 에세이’… 20년 투병 끝 단식 택한 어머니
생전 장례식 치르고 편안히 떠나… 21일의 마지막 여정 담담히 그려
◇단식 존엄사/비류잉 지음·채안나 옮김/268쪽·1만6800원·글항아리



20여 년간 투병한 끝에 ‘단식 존엄사’를 선택한 저자의 어머니(왼쪽)가 단식 중 방문한 증손자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어머니는 단식에 들어간 지 21일째에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다. 글항아리 제공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우리의 평균 수명은 크게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마(病魔) 앞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버거운 고통을 주는 병도 많다. 죽음과 죽을 정도의 아픔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개념이 ‘존엄사’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은 2018년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인 존엄사만 허용되고 있다. 환자가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나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직접 투여하는 ‘안락사’는 모두 금지다. 이달 국회에서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되긴 했지만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버튼만 누르면 수초 내 고통 없이 사망할 수 있는 ‘안락사 캡슐’이 개발된 스위스 등과는 다른 분위기다.

그렇기에 신간의 제목은 다소 낯설고 불편하게도 느껴진다. “‘굶어 죽는 것’에 존엄이라는 개념을 붙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따라왔다. 책은 대만 재활병원 의사인 저자가 ‘소뇌실조증’에 걸린 어머니의 단식과 죽음을 지켜보며 쓴 에세이다. 소뇌실조증은 동작 간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 기능을 상실해 말년에 반신불수에 이르는 유전병이다.

어머니는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인 64세에 이 병을 진단받은 뒤 20여 년간 투병한 끝에 의사인 큰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내가 살아 있는 의미가 없어지면 떠날 수 있게 도와줘.” 대만도 한국처럼 적극적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린 일본 도와다호에 서 있는 저자(오른쪽)와 어머니. 

저자는 어머니가 21일간 곡기를 끊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처음 10일간은 음식 섭취를 천천히 줄여나가되 죽과 오일, 삶은 채소, 연근물 등을 주로 먹었다. 11일째부터는 고형 음식을, 13일째부터는 연근물을 끊었다. 어머니는 잠에 빠지는 시간이 점차 늘면서 단식 21일째에 편안한 얼굴로 숨을 거뒀다. 이때 가족들은 어머니의 분부대로 아무도 울지 않았다. 저자는 그저 “어머니는 이 세상의 고통과 이별하고 구름처럼 온 천하를 유람하러 갔다. 아미타불!”이라고 외친다.

신간은 죽음에 대해 더욱 성찰하게 만드는 시간을 갖게 한다. 누구나 맞는 죽음이지만 우리 대다수는 이 점을 잊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일쑤다.

저자의 가족이 어머니의 ‘생전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어머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부를 남기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영상을 감상한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미처 모르는 찬란한 시절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가도, 남은 이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다.

책처럼 중병에 걸린 부모가 자식에게 존엄사 얘기를 먼저 꺼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쉽지는 않다. 다만 어머니의 존엄사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 저자의 선택은 분명한 사랑으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가족 간의 ‘힐링 에세이’이기도 하다. 대만의 존엄사 역사, 장례 문화 등도 새롭게 비친다. 무엇보다 존엄사, 더 나아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