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정물화의 반전 매력
시테렌베르크의 정물화… 고독하고 불안해 보이는 레몬
이성복 시 연상시키는 수박 그림… 아침 식사 장면엔 위태로움과
일상 사는 보통 사람 결단 읽혀
《정물화는 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사물을 즐겨 묘사한다. 정물을 그리는 이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 사소한 것에 중대한 것을 담거나, 그 비근한 데서 원대한 것을 담거나, 그 일상적인 데서 초월적인 것을 담거나, 그 범용한 데서 아름다움을 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야심이 있다면, 그 죽은 듯한 사물에 현실의 삶을 담는 것이다. 정치적 대격변기를 살았던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다비트 시테렌베르크(1881∼1948)에게도 야심이 있었을까.》
야심이 있었다 해도 그 야심은 정치적 야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테렌베르크는 정치적 이미지가 포화 상태였던 시대를 살았지만, 정치 선전화와 거리가 먼 그림을 그렸다. 그가 천착했던 장르 중 하나인 정물화를 살펴보자.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다비트 시테렌베르크(1881∼1948)의 정물화. 컵과 레몬을 그린 ‘Nature
Morte’. 사진 출처 artnet 홈페이지·위키미디어커먼스
레몬과 컵이 주인공인 이 ‘정물화’는 거의 형식 실험처럼 보인다. 레몬과 컵이 무슨 대단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별 내용 없이도 레몬과 컵은 시선을 잡아끈다. 왜 레몬과 컵은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을까. 옆에 있을 수도 있는데 왜 이토록 거리를 유지한단 말인가. 바닥의 격자무늬는 이 레몬과 컵이 심지어 일렬로 놓여 있지조차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래서 레몬은 고독해 보인다. 아예 상대가 없으면 그저 고고해 보였으련만, 뚜렷한 관계를 맺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있는 상대 때문에 레몬은 고독해 보일 뿐 아니라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물화’를 채우고 있는 선들도 이 불안감에 일조한다. 벽에서 내려오는 선은 식탁보의 선과 어떤 식으로도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특히 모서리를 보라. 식탁보의 선은 벽면의 선과 의도적일 만큼 엇갈린다. 게다가 식탁보는 일부러 평면이 아닌 것처럼 기운 듯 그려졌다. 레몬은 이 엇갈리고 기울어진 환경에 불시착한 외눈박이 괴물의 눈알처럼 보인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다비트 시테렌베르크(1881∼1948)의 정물화. 잘린 수박과 칼을 배치한 ‘Still life with watermelon’. 사진 출처 artnet 홈페이지·위키미디어커먼스
반면, ‘수박이 있는 정물’은 거의 도형으로 구성된 추상화처럼 보인다. 식탁, 수박, 수박 껍질, 접시, 칼이 만드는 선의 구성만 보고 있어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성적인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것은 수박이 아닌가. 그것도 누군가 탐식하고 난 수박의 잔해가 아닌가. 수박은 그 붉은 살빛으로 말미암아 강한 정서적 울림을 준다. 시인 이성복은 ‘수박’이라는 시에서 그 정서를 이렇게 노래했다. ‘검은 등에 흰 배의 고등어 같은 부엌칼로 띵띵 부은 수박의 배를 가르면, 끈적거리는 단물을 흘리며 벌겋게 익은 속이 쩍 갈라 떨어지고 쥐똥 같은 검은 알이 튀어나온다. … 어느새 수박씨는 마루 여기저기 흩어지고 허연 배때기를 드러낸 수박 껍데기가 깨진 사기 접시처럼 쌓일 때…’ 이것은 마치 시테렌베르크의 ‘수박이 있는 정물’을 노래한 시 같지 않은가.
이성복의 시를 따라서 ‘수박이 있는 정물’을 해석하면, 이 그림은 정물화보다는 생활의 단면을 포착한 풍속화처럼 보인다. 이성복은 그 풍속을 물난리에 비유했다. ‘그것은 어느 여름 어른들이 겪었다던 물난리 같은 것일까? 질퍽하고 구질구질한 난장판 같은 것일까? 아버지의 작업복을 기워 만든 걸레로 마룻바닥을 훔치며 어머니는 바닥 여기저기 묻어 있는 수박물을 볼 것이다. 벌건, 그러나 약간은 어둡고 끈끈한 수박물을…왠지 쓸쓸해지기만 하는 어떤 삶을…’ 그러나 시테렌베르크가 포착한 생활은 장마철 물난리와는 다른 종류의 쓸쓸함을 머금고 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다비트 시테렌베르크(1881∼1948)의 정물화. 두 남녀의 아침 식사를 그린
‘Breakfast’. 사진 출처 artnet 홈페이지·위키미디어커먼스
시테렌베르크가 그린 ‘아침 식사’라는 그림을 보자.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붉은 과일을 건네고 있다. 이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건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낙원에 있는 게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현장에 있다. 기어이 살아가야 할 평범한 어느 하루, 그 아침, 그 식탁 앞에 있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아침 식사를 먹는다.
그런데 어째 그들은 위태로워 보인다. ‘수박이 있는 정물’에서처럼 칼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일까. 바게트의 잘린 단면을 볼 때, 이 칼은 이미 수박을 베듯 빵을 베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에 그치지 않고 칼은 날카롭게 남녀를 향하고 있다. 손잡이가 남녀의 반대쪽에 위치되어 있기에, 그 칼은 그 남녀의 도구라기보다는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타자로 보인다. 언제든 남녀를 상처 낼 수 있는 흉기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 불안감은 칼 밑에 깔린 흰 천 때문에 증폭된다. 흰 천도 불안하다. 언제라도 바닥으로 흘러내릴 것 같다. 흘러내리고야 말 흰 천 위의 칼은 그만큼 유동적이다. 흰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칼은 남녀를 향해 날아갈지도 모른다.
마지막 미스터리는 남자의 왼손이다. 남녀의 손들이 드러나 있지만, 남자의 왼손만큼은 탁자 아래에 감추어져 있다. 이 역시 불안을 증폭한다. 이 남자의 왼손이 식탁 위로 올라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일을 건네는 여자의 바람대로라면 그 왼손은 과일을 선뜻 받아 쥐어야 할 것 같은데, 남자는 끝내 망설인다. 아담과 이브를 그린 그림들이 선악과를 받아 드는 아담을 그려왔다면, 이 그림은 노동을 위한 음식 앞에서 주저하는 아담의 후예를 그린다. 그는 선악과를, 아니 일상의 양식을 과연 받아 들 것인가, 그렇게 주린 배를 채우고 또 하루를 시작할 것인가. 오늘도 변함없이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보통 사람이 직면하는 결단의 순간이 여기에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