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할 결심’이 서자 중고거래 앱을 열어 ‘판매가 1만 원’을 올립니다. 빠르고 쿨한 거래를 기대하면서요. 중고거래에서 ’쿨’함이란 5회 이내의 대화로 거래를 완료하는 것.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제가 구입할게요(고맙습니다), 입금완료(확인완료), 아래 주소에서 거래해요(알겠습니다)’. 반대로, 언제 얼마에 샀는지, 왜 파는지, 가품은 아닌지 묻고, 추가 사진을 요청하며 빙빙 돌리다가, ’에누리 안돼요?’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손님(?)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판매업이니까요. 하하.
4년 전, 처음 발을 내디딘 ‘당근 유니버스(친환경적, MZ특징적 소비 트렌드를 브랜딩하는데 성공한 중고거래앱들)’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가격 결정이었어요. 내가 사용한 물건의 가치는 얼마일까. 우선, 구매 당시의 가격, 연식, 사용감을 반영한 가격을 책정합니다. 꽤 합리적이죠. 그러나 뇌의 해마에 있던 ’말도 안돼’ 계산기가 슬슬 작동합니다. 이 옷값 할부 갚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가격에 팔다니 말도 안돼.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은 새 운동화를 이 가격에?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명품이라도 팔기엔 너무 낡았잖아. 명품 로고는 있지만, 사은품을 파는 게 말이 돼? 결국 최종 가격은 ’기분 내키는대로’ 정하곤 했어요.
‘패션에디터들도 고개를 돌려 쳐다본 해체주의적 재킷은 패션계에서 일했던 시절의 흥미진진한 기억일 뿐. 중고시장에선 명품 로고 찍힌 사은품 파우치가 훨씬 더 인기 있더라고요.
중고마켓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당근’ 품목은 역시나 샤넬백이에요. 새상품 구매가 쉽지 않아 감가상각은커녕 ‘중고’인 ‘새’ 샤넬백이 거액의 프리미엄과 함께 거래되는 ‘샤테크’의 현장이죠. 한 중고명품 거래 플랫폼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MZ세대도 샤넬 등 전통의 명품을 가장 선호한다고 해요. 최근엔 ‘조용한 럭셔리’ 브랜드인 ‘셀린느’의 거래가 늘었고, 가방뿐 아니라 의류의 중고 거래 비중이 커졌답니다. 유니클로와 자라의 강력한 경쟁자가 리바이스가 아니라 당근이라는 분석은 사실에 가까워요. 새 유니클로를 사느냐, 중고 ‘셀린느’냐가 MZ의 고민인 거죠.
그간의 경험들로 볼 때 빠른 정리를 위해 명품도 아닌 개인 취향 액자를 1만 원으로 책정한 건 스마트한 결정이었어요. 하지만 당근거래의 강점이자 함정은 ‘당신 근처’의 거래라는 것. 대한민국 2000만이 당근앱을 가졌는데, 함께 파리를 여행했던 친구가 오르세의 포스터를 알아볼 가능성은 없을까요. ‘파리 여행 때 산 포스터를 당근했더라? 우리 미술관에서 진짜 오래 줄 서고, 포스터 구겨질까봐 통에 넣어 여행 내내 끌고 다니느라 고생했잖아. 그 여름 얼마나 더웠는지 기억해? 내가 살 걸, 아깝네.’
이런! 재빨리 거래앱을 열어 액자를 가져간 한남동의 구매자를 찾아내 친구의 섭섭한 마음을 요령있게 설명한 뒤 액자를 ‘재당근’하는데 성공, 아이보리색 종이로 다시 포장해서 친구에게 선물했다, 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요. 중고거래가 없었다면, 그 액자엔 폐기물 스티커가 붙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랜만에 친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을 테고, 포스터 통을 끌고 다녔던 파리의 여름날도 기억할 일이 없었겠죠. 추억을 ‘당근’해버린 나의 뻔뻔함이 새 추억이 되었고요. 물건에 먼지처럼 가라앉은 추억의 가격을 생각해보곤해요. 쿨 거래도, 네고도 없이요. 주의: 중고거래에선 당신의 친구, 동료와 상사를 만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madame carr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