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펴낸 강문식 교수
고려왕조를 지킨 지조의 상징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전장에서 이성계의 군사참모로 두 번이나 발탁되는 등 오랜 기간 교유를 맺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강 교수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이후 고위직을 유지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모습을 볼 때 ‘이성계가 정몽주를 고위직으로 이끌었다’는 기록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막판에 노선을 달리했지만, 사림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된 16세기 후반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예컨대 그가 선죽교에서 피살됐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강 교수는 “태조실록 등에 따르면 정몽주의 피살 장소는 선죽교가 아닌 개경의 태묘동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이방원 앞에서 부른 ‘단심가’ 역시 1617년 간행된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처음 실려 있어 조작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신간은 냉철한 정치가로서 정몽주의 면모도 조명한다. 30년 지기지만 정적이 돼 버린 정도전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모친 혈통에 노비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이용한 게 대표적이다. 강 교수는 “정몽주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면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백성을 위해 고민한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