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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임우선]美대선 100일 앞… ‘약자=민주당 지지’ 공식 바꾸고 있는 노숙인 문제

입력 | 2024-07-30 23:09:00

노숙인 급증에 몸살 앓는 뉴욕
불법 이민자 유입 등으로… 뉴욕 노숙인 20년 최고
“세금 안 낸 외국인만 수혜”… 美 시민 불만 고조
‘민주 텃밭’ 캘리포니아州… 주민 불만에 노숙인 쉼터 해체




미국 뉴욕 맨해튼 58번가 인근 길바닥에 누워있는 한 노숙인(왼쪽). 최근 뉴욕 등 미 주요 대도시는 노숙인 급증과 이에 따른 사건사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문제는 11월 5일 대선의 주요 의제로도 떠올랐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29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42번가 타임스스퀘어 광장. 일대는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한낮의 열기와 시큼한 냄새로 가득했다. 냄새를 따라 눈을 돌리니 바삐 걸음을 옮기는 관광객들 사이로 미동도 없이 시멘트 바닥에서 잠든 맨발의 노숙인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마약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20대 청년 노숙인이 괴성을 지르며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있었다. 그는 행인들 사이를 쏘다니며 욕설도 쏟아냈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익명을 원한 인근의 한 잡화점 사장은 “난 백인이 아니지만 11월 대선에서 무조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를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년 전부터 가게 앞에 노숙인들이 진을 치면서 매출이 약 25% 떨어졌고 부동산 가치도 급락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노숙인들이 종종 매장을 급습해 물건을 훔치거나 밤에 칼로 직원을 위협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맨해튼이 강력 범죄가 기승을 부렸던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대선에서는 이 짜증나는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을 뽑겠다”고 말했다.

그간 미 정치권에서는 대도시 거주자, 비(非)백인계 등은 주로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게 일종의 불문율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선이 채 100일도 남지 않은 지금 최근 몇 년간 노숙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뉴욕 등 주요 대도시에서는 조금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불법 이민자, 마약 중독자, 노숙인 등을 ‘약자’로 여겨 이들에게 온정적인 정책을 편 것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책 때문에 생활이나 경제활동에 피해를 봤다고 여기는 대도시의 ‘친민주당 성향 저소득층’이 공화당을 지지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런 분위기가 이번 대선에서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뉴욕 노숙인 7만 명…20년 최고치

미국 뉴욕 맨해튼 도심의 또 다른 노숙인.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지난달 뉴욕시 당국 자료에 따르면 현재 뉴욕에만 약 7만 명의 노숙인이 있다. 이 중 최소 4100명이 보호소가 아닌 거리, 지하철 등에서 잠을 잔다. 노숙인 시민단체들은 “너무나 과소평가돼 있어 의미 없는 숫자”라고 지적하지만 이 수치 기준으로도 뉴욕 노숙인 수는 최근 20년 이래 최고치를 찍었다.

노숙인이 급증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첫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계속되고 있는 집값 상승이다. 둘째는 불법 이민자 유입이다.

하버드대 공동주택연구센터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사태 뒤 미 전역의 집값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의 기존 최고치보다도 30% 이상 올랐다. 맨해튼 기준으로도 방 하나짜리 아파트 가격이 코로나19 사태 전 방 두 개짜리 아파트 값보다 비싸졌다.

이는 그만큼 집값을 내지 못해 거리로 밀려나는 미국인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특히 65세 이상 노인 수가 급속히 늘고 있다”고 전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사람들은 모두 시가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 뉴욕은 미 대도시 어디에도 없는, ‘잠잘 곳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침대를 보장해야 한다’는 일명 ‘쉼터에 대한 권리’(Right to Shelter)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불법 이민자들까지 대거 뉴욕으로 유입되면서 쉼터는 이제 일주일을 기다려도 자리가 나지 않을 만큼 완전 포화 상태다.

주로 남부 텍사스주를 통해 미국에 입국한 불법 이민자들이 차로 29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뉴욕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불법 이민자들을 무료 버스에 태워 뉴욕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국경지대에 접한 우리가 겪는 불법 이민자 문제를 당신들도 한번 느껴보라’는 취지다. 애벗 주지사는 뉴욕은 물론이고 수도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 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이 있는 주요 대도시로도 불법 이민자를 실은 버스를 보냈다. 이로 인해 ‘텍사스주에만 도착하면 비행기처럼 큰 무료 버스가 있다’는 소식이 불법 이민자들 사이에 퍼졌고, 더 많은 이민자가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고 NYT는 지적했다.

가장 많은 불법 이민자를 ‘수송 당한’ 뉴욕은 지난달까지 총 4만5033명의 불법 이민자를 받았다. 이들 중 많은 수는 노숙인이 됐다. 결국 뉴욕은 2022년 이후 노숙인이 가장 많이 늘어난 도시로 변했다. 쉼터를 불법 이민자들이 차지하면서 집을 잃은 미국 시민이 쉼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NYT는 “처음 쉼터에 대한 권리 법이 만들어진 1981년만 해도 뉴욕 주민을 위한 125개의 침대만 마련하면 됐지만 지금은 6만5000명의 이주민을 포함해 12만 명 이상이 쉼터에서 산다”고 전했다.

● 시민 “불법 이민자로 우리 혜택 줄어” 불만


뉴욕 시민들은 이런 상황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맨해튼 거주자 마크 씨는 “평생 세금을 낸 미국 시민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데 불법으로 넘어온 외국인이 쉼터뿐 아니라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선불) 카드까지 제공받는 상황이 공평하지 않다”고 했다.

노숙인과 관련된 사건사고 또한 시민 불만을 고조시키고 있다. 노숙인의 마약 문제, 정신건강 이상 등이 얽혀 최근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구타하거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민을 선로로 밀쳐 죽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절도 사건 또한 빈번해져 최근 뉴욕 내 주요 상점에서는 자물쇠가 달린 유리 진열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안에 보관된 상품들은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치약, 칫솔 같은 평범한 생필품이다. 노숙인이 주로 이런 물건을 노리는 탓이다. 카페 안으로 뛰쳐 들어와 카운터 앞에 놓인 팁을 넣는 통을 들고 도주하거나, 냉장 매대에 전시된 음료수를 훔쳐 달아나는 상황도 빈번하다.

최근 뉴욕포스트는 맨해튼, 퀸스, 브롱크스,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 등 뉴욕 내 5개 자치구의 이민자 쉼터 설치 현황을 분석하며 “절반의 쉼터가 퀸스 등 가장 가난한 지역에 몰려 있다”고 꼬집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제3세계’”라며 “우리 지역에 범죄를 가져오는 게 민주당이 원하는 것이냐”고 불만을 쏟아낸다. 공화당이 민주당을 공격할 때 불법 이민자 의제를 항상 거론하는 이유 또한 이런 민심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캘리포니아주도 노숙인 캠프 해체

지난달 미 연방대법원은 각 지방자치단체가 노숙인을 몰아내는 데 더 큰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25일 민주당 소속인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또한 지역 내 수천 개 노숙인 캠프를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가장 진보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그동안 ‘민주당 텃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뉴섬 주지사도 최소 18만 명의 노숙인이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현실’과 커지는 주민들의 불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NYT는 “보수파와 캘리포니아주의 민주당 세력은 그간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지만 노숙인 의제에서 ‘특이한 동맹’을 맺었다”고 평가했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