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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구름속 달… 숲 헤치는 늑대, ‘아웃사이더’ 차일디시가 그린 풍경

입력 | 2024-07-31 03:00:00

소설-음반으로도 잇단 유명
리만머핀 서울서 개인전 열려





1990년대 말 영국의 젊은 미술가(yBa·young British Artists)들이 죽은 상어, 침대, 피로 만든 두상 등을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전시할 때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은 미술가가 아니다”라고 반박한 화가들이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리 차일디시(본명 스티븐 햄퍼·65·사진)는 그림에 집착(stuck)한다는 연인 트레이시 에민의 핀잔을 그대로 가져와 ‘스터키즘’(회화를 고집하는 미술 운동)을 선언했다. 영국 미술사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 한가운데 있었던 화가 차일디시의 최근 작품이 리만머핀 서울에서 공개됐다.

영국 작가 빌리 차일디시가 4년 만의 한국 개인전에서 선보인 신작 ‘Wolf Walking’. 작가·리만머핀 제공

4일 개막한 차일디시의 개인전 ‘now protected, I step forth(보호받았으니, 나는 이제 나아간다)’는 작가의 자화상으로 시작한다. 여러 색의 유화 물감으로 붓 터치를 하고, 목탄으로 윤곽을 잡은 그림은 배경의 리넨이 훤히 보인다. 여러 번 고민하고 고친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그려 나간 느낌이 역력하다.

차일디시는 이렇게 틀에 묶이지 않는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해 왔다. 그가 쓴 시나 음악에서는 마약 딜러로 감옥을 드나든 아버지 등 굴곡진 가정사나 트라우마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 등장한다. 16세에 중학교를 그만두고 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하자 지역 조선소의 견습 석공으로 일했고, 홀로 그린 그림 수백 점을 제출해 런던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퇴학을 당하고 오랜 기간 직업 없이 살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소설과 시 40여 권, LP 170여 장을 발매하며 창작 활동을 한 그는 자신을 ‘아웃사이더 예술가’로 규정한다. 2012년 한국 첫 개인전에서는 이런 예술가들의 ‘기이한 용기’를 주제로 연작을 공개하며 한국의 문학가인 이광수와 이상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뜨거웠던 시간은 뒤로하고 고요하고 신비로운 자연 풍경을 주로 담았다. 보랏빛 구름이 일렁이는 하늘 가운데 떠 있는 달, 눈밭 위에 서 있는 나무, 숲을 헤치며 어슬렁거리는 늑대가 등장한다. 리만머핀 서울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숭고함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8월 17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