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가 현실이 됐다. 6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대선 TV토론은 미 정치사에 가장 큰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킨 사건 중 하나로 남으리라. 현직 대통령의 대선 후보 사퇴를 촉발한 가혹한 트리거(trigger·방아쇠)가 됐기 때문이다. 그날 토론은 조 바이든 대통령(82)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과는 별개로, 세상만사는 상대적이란 걸 깨닫게도 해줬다. 바이든 대통령의 멍한 표정은 토론 보름 전쯤 78세 생일이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를 무척 젊어 보이게 만드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파리=AP 뉴시스
같은 달 30일 프랑스 정당 대표 3자 TV토론은 또 다른 착시 현상이 두드러졌다. 트럼프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정당의 마뉘엘 봉파르 의원이 지긋해 보였다. 집권당 르네상스의 가브리엘 아탈 총리(35)와 극우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29)가 워낙 아이돌처럼 말쑥하게 생긴 탓이 컸다. 그렇다고 해도 대표 셋이 모두 20, 30대인 토론은 참 낯설고도 부러웠다.
다카시마 료스케 일본 아시야 시장. 더블린=AP 뉴시스
흔하진 않지만 아시아에도 주목받는 청년 정치인이 있다. 일본 효고현 아시야시의 다카시마 료스케(高島崚輔) 시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4월 당선된 그는 1997년생. 재임 1년이 지났는데 스물일곱 살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노인들이 지배하는(gerontocratic) 일본 정치판에 거의 유일하게 맞서는 인물”이라고 불렀다.
유럽 정치계는 풀뿌리 청년 조직이 잘 갖춰져 젊은 정치인의 등장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각광받는 20, 30대 정치인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의 후광보단 자기 힘으로 기반을 다진 자수성가 스타일이 많다. 이민자 출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바르델라 대표는 빈민가에서 생계 곤란을 겪으며 꿈을 키웠다.
요즘 세대답게 소셜미디어 활용에 능숙한 점도 공통분모다. 물론 바이든이나 트럼프도 틱톡은 한다. 하지만 청년 정치인들은 정책 홍보보단 유권자와의 공감대 형성에 주력한다. 올 4월 취임한 사이먼 해리스 아일랜드 총리(37)는 별명이 ‘틱톡 총리’일 정도다. 아일랜드 역대 최연소 총리인 그는 자신의 ‘울퉁불퉁했던’ 10대 이야기를 들려주며 젊은층의 공감을 샀다.
다카시마 시장도 유럽 청년 정치인들과 닮은 점이 많다. 유복한 집안의 ‘엄친아’이지만 계파 정치가 단단한 일본에서 별 뒷배 없이 무소속 신화를 일궈냈다. 그간 일본 청년 정치인들은 거물 아버지의 후광을 입거나 지역구를 물려받은 경우가 다수였다.
소셜미디어 활용도 적극적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다카시마 시장은 “도쿄대와 하버드대 중 어디가 입학이 어렵냐”란 장난 섞인 질문에도 성실하게 자기 경험을 들려줘 화제를 모았다. 구글 입사시험 문제를 풀어보는 영상은 조회 수가 100만 회를 넘었다.
이들의 공통점엔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그들의 ‘접촉’은 온라인에 그치지 않았단 점이다. 곧 물러날 아탈 총리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하는 소통 능력”(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이 강점으로 꼽혔다. 그의 유세장은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대가 폭넓기로 유명하다. 다카시마 시장은 중고교 교칙 개정안 추진 때 이해당사자들과 수시로 직접 대화했다. 뻔한 공청회가 아니라 학생과 교사를 따로 만나 속내를 들었다고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젊은층의 의사가 반영되기 힘든 일본의 상명하복 문화(top-down culture)를 현장에서 발로 뛰어 이겨냈다”고 호평했다.
생물학적 나이가 다는 아니다. 이른바 ‘젊꼰’(젊은 꼰대)도 많고, 중장년층의 경륜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50대 이상만 가득해 기성세대에게 치우친 정치가 미래세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헤아릴까. 최근 개원한 한국의 22대 국회는 20대 의원이 한 명도 없다. 30대도 겨우 4.7%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