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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론/임성호]여사 리스크 줄이기, ‘내조만 충실’ 약속 이행이 우선

입력 | 2024-07-31 23:15:00

정치 양극화 속 영부인 논란, 국정에 무리수
뒤늦게 영부인 활동 관리할 제2부속실 설치
제도적 관리보다 대통령 부부의 결단이 중요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논란과 의혹은 여야 갈등과 여당의 내부 긴장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사 주체인 검찰의 분란거리이자, 나아가 국정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의 원인이다. 이에 대통령실은 영부인의 활동을 관리할 제2부속실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결과론이지만, 연초 거론되었을 때 진작 설치했어야 한다. 만시지탄이나 이제라도 여러 관리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제도만으론 효과를 내기 힘들다. 더 근본적인 과제는 시대 상황에 맞는 영부인상(像)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영부인의 바람직한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이 과제를 위해선 오늘의 시대 흐름을 읽는 정치적 감각이 중요하다.

대통령제의 원형이고 ‘퍼스트 레이디’란 말이 처음 나온 미국의 경우에서 시사점을 얻어 보자.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수시로 국정 조언을 해주었고 남편을 위해 언론에 호소하는 일도 사양하지 않았다. 출범 초기 국가 체계를 세워야 했고 정치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당시, 지성을 갖춘 영부인의 적극적 내조는 두루 호평을 받았다. 동시대에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부인 돌리도 적극적인 자세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사교 모임을 자주 열어 반대편 정치인들까지 초대하며 초당적 우호 분위기를 조성해 남편을 도왔다. 그의 이런 모습은 대중의 큰 호감을 샀다.

20세기 들어 여성도 참정권을 얻고 대거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애비게일이나 돌리의 내조형 모습으론 높은 평가를 받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가 새로운 영부인상으로 국민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독자적으로 여성, 아동, 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위해 활동했고 신문 기고, 라디오 방송 고정 출연, 정기 기자회견으로 맹렬 여성으로서의 위상을 세웠다. 때론 남편과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과거였다면 거센 거부반응을 일으켰겠지만 바뀐 시대에는 전국적 호평의 대상이 되었다.

엘리너의 사회 활동은 그 후 로절린 카터의 여성 및 정신건강 운동, 낸시 레이건의 마약 퇴치 운동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어서 힐러리 클린턴은 영부인의 역할을 정치 영역에까지 끌어올리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의료 개혁안 책임자가 되어 의회 통과를 위해 정치적으로 힘썼고 국제관계에서도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다. 영부인으로서 힐러리가 보여준 모습은 그가 남편 퇴임 후에도 상원의원, 국무장관, 민주당 대선 후보로 클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21세기에 또 변했다. 양극화가 미국 정치를 살벌한 전투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시대에 영부인이 엘리너나 힐러리처럼 적극성을 띤다면 법적·윤리적 근거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거세지고 국정에 무리수가 되었을 것이다. 21세기 영부인들을 보면 로라 부시부터 미셸 오바마, 멜라니아 트럼프, 질 바이든까지 모두 공적으로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던 미셸마저 빈곤, 교육, 건강 이슈에 관한 활동을 내조 삼아 다소 했을 뿐이다. 정치 대결이 극한으로 가는 시대에 고개를 높게 들지 않는 정치적 센스를 발휘한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자. 미국처럼 양극적 정치 대결이 블랙홀이 되어 사회 전체를 빨아들이고 있다. 영부인이 높은 지성과 덕성을 갖추어도 공적 목소리를 내는 순간 정치적 논란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과거였다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적 대화나 비공식적 행동도 적대적 정치인들에 의해 스캔들로 비화하기 쉬운 상황이다. 국민의 문화 가치관도 적극적 영부인상에 호의적이지 않다. 권위주의 문화가 약해짐으로써 더 이상 영부인을 국모처럼 떠받들던 시대가 아니다. 또한 여권 신장이 이뤄졌으나 공정성·형평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퍼짐으로써 공직자도 아닌 영부인이 목소리 내는 걸 용인하는 시대가 아니다. 자칫 남편 덕에 으스댄다고 ‘남편 찬스’ 논란마저 일어나기 쉽다. 여성 지위가 나아지고 여성 대통령도 나온 상황이라 영부인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논리도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이런 시대엔 영부인이 조용히 사인(私人)처럼 있는 게 정치적으로 현명하다. 본인으로선 답답하겠으나 시대 상황상 어쩔 수 없다. 본인도 대선 당시 내조에만 충실하겠다고 말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제가(齊家)를 해야 치국·평천하도 가능한 시대다. 부인, 자녀, 형제에 의한 문제로 역대 대통령마다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 전철을 피하려면 어떤 제도적 관리 방안보다도 결국 대통령과 영부인의 정치적 감각과 결단이 중요하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