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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품위를 지켜주는 ‘작은 안전지대’[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입력 | 2024-08-01 22:57:00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싶던 이유는 포스터 이미지(사진) 때문이었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볕을 맞으며 잠옷 차림으로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할 남자의 옆모습. 그 남자의 직업이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는데 그의 공간에 묘한 기품과 단정함이 흐르는 걸 보면서 젊어서부터 의학과 철학, 미술을 두루 공부한 이 세계적 명성의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영화를 본 후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장면 역시 그의 방이었다. 잠들기 전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을 때 함께하는 작은 조명, 무지에서 샀을까 싶은 통일된 컬러의 이부자리, 그리고 창문 밑으로 맞춤하듯 들어간 책장. 그가 청소부가 되기 전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하게 하는 건 수수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세간들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나무 책장은 분명 동네 목수에게 부탁해 맞춤으로 만들었을 거야. 기존에 쓰던 것을 대충 가져다 두었다면 그렇게 딱 맞아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 그런 유추를 하고 있으면 그가 짐을 줄여 이사 온 작은 집에서 줄자로 빈 공간의 길이와 폭을 재고 종이에 수치를 적은 후 자전거를 타고 동네 목수를 찾아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쪽으로 매일의 물건을 들여놓는 태도야말로 주인공의 삶에 어떤 안정감을 부여하는 장치이자 전제라 여겼다.

최근 부산에 있는 100년 가옥 ‘오초량’에서 전시 기획자로 참여해 그림과 가구를 소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살던 적산가옥에는 1, 2층 모두 제법 널찍한 도코노마(床の間)가 있었다. 바닥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붙박이형 구조물을 만들어 놓고 벽면에는 족자를 내리고, 바닥에는 화병을 놔 계절마다 꽃도 꽂는 공간. 그곳이 있었던 덕분에 작품들을 더 힘 있고 색다르게 선보일 수 있었다. 한때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공간은 일본의 작은 집에도 ‘고정값’으로 들어가 있는데 그곳을 매일 보다 보니 그 작은 공간이 일상을 지키는 안전지대로 느껴졌다. 집이 작다고 모든 공간을 쓸모로만 채우면 오히려 숨 쉴 곳이 없어 일상을 더 빡빡하고 고단하게 만든다. 효용은 쓸모를 버릴 때도 찾아온다. 일상은 반복되는 것이고 그 반복이 힘겨워지지 않으려면 작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끝내 지키며 살아야 한다.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가 한쪽 방을 가득 채운 식물을 보며 아침마다 흐뭇한 눈인사를 건네고 정성껏 물을 주는 것처럼.

사전에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또 영화를 보고 나서 일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벽안(碧眼)의 감독이 어떻게 평범한 개인의 삶에서 ‘인생의 품위’를 말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는 일상을 돌보는 사람들의 태도와 문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올림픽을 치르며 다름 아닌 공공의 화장실을 위해 실력 있는 자국 건축가들을 불러 모으고, 상점에서는 전국의 장인들이 만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공예품을 쉽게 만날 수 있고,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란 뜻의, 일상의 아름다운 순간을 추앙하는 듯한 어감의 ‘고모레비(こもれび)’라는 단어가 있는…. 인생은 누구에게나 크고 무거워 결코 완벽해질 수 없지만 그 불가능한 미션을 잠시나마 가능한 쪽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의 작은 만족과 기쁨임을 이 거장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