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경제부 기자
“카드만 됩니다.”
주차비 정산을 위해 지갑을 꺼내 지폐를 세자 돌아온 답이다. 낡은 건물 주차장이지만 결제만은 요즘 방식이었다. 하긴 ‘현금만 받아요’라는 말보다 ‘현금 안 받아요’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 시대다. 서울 시내버스 4대 중 1대는 ‘현금 없는 버스’로 운행된다. 스타벅스가 2018년 도입한 ‘현금 없는 매장’은 이제 다른 커피전문점에서도 표준이 됐다.
그래서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가 점점 사라진다. 이용자가 줄어 수수료 수입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2018년 이후 사라진 ATM은 1만4426대. 얼마 전 대구의 한 은행이 ATM 철수를 알리기 위해 붙인 안내문엔 주민들의 손글씨가 빼곡했다. ‘제발 있어 주세요’, ‘가지 마세요’.
현실로 다가온 현금 소멸 위험
현금을 뽑기도, 현금을 쓰기도 어려워진 시대. 이대로 현금은 멸종할 것인가.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현금 시대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주는 지난 몇 달 동안 현금 운송회사 아마가드의 파산 위기로 시끄러웠다. 현금 사용량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아마가드 트럭에 실리는 현금량이 급감했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실물 화폐 운송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아마가드가 현금운송 사업이 지속 불가능하다고 경고한 게 지난해 말. 운송 트럭이 멈추면 은행과 ATM 어디에서도 현금을 구할 수 없게 된다. 반강제적으로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할 판이었다. 결국 호주 주요 은행과 대형마트가 5000만 호주달러를 아마가드에 긴급 지원해 간신히 급한 불을 껐다.
현금은 발행과 운송에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거슬러주기에 불편하기도 하다. 디지털 결제의 편리함은 현금을 빠른 속도로 밀어낸다. 스웨덴은 모바일 결제 서비스 ‘스위시(Swish)’가 널리 보급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나라다. 버스는 현금을 받지 않은 지 오래고, 많은 상점에선 카드나 모바일 결제만 된다. 심지어 현금을 취급하지 않는 은행 지점도 많아서, 은행 계좌가 있어도 창구에선 현금으로 입금하기 어렵다. ‘현금이 왕’이란 말은 옛날얘기가 됐다.
현금 쓸 권리 지키기 나선 국가
그런데 현금의 종말을 막기 위해 나선 나라도 있다. 현금 결제 비율이 고작 3%밖에 되지 않는 노르웨이가 대표적이다. 최근 금융계약법을 개정해 소비자의 현금 지불 권리를 명문화했다. 자동판매기나 무인가게가 아닌 모든 판매점은 현금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위반하면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도 만들었다.
한때 ‘2030년 무현금 국가’를 외쳤던 노르웨이는 왜 정책 방향을 틀었을까. 아무리 디지털 결제가 일반화됐다고 해도 여전히 현금이 아니면 결제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로 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없거나 디지털 기기 사용이 서툰 취약계층이다. 전력망, 통신망이 멈추는 긴급 상황에서 통하는 건 현금뿐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도 현금 지불 권리에 대한 법 조항이 있다. 한국은행법 48조는 ‘한국은행권은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규정한다. 다만 위반해도 처벌 규정이 없으니 선언에 그친다. 현금을 공공재로 보고 유지 비용이 들더라도 지킬 것인가. 이제 우리도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