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김치연구소. 안지현기자 anji1227@donga.com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우선 김치로 만들어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야채(또는 과일까지)를 하나 상상한다. 그러곤 그 야채로 담근 김치가 있는지 검색한다. 그럼 이제 당신은 나지막하게 읊조리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김치가 되는구나.
모든 것은 김치가 된다
김치 게임은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이 찾은 김치를 올리는 놀이였다. 누군가 OO김치 사진을 올리면 온갖 반응이 붙는다. 어떻게 이 채소로 김치를 만드냐는 반응과 이걸 여태 몰랐느냐는 장난 섞인 야유가 나온다.그런 사연을 읽다보면 우리가 김치를 만들어 먹는 입맛의 공동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멕시코 사막에선 선인장으로, 이집트에선 아티초크(꽃봉오리 채소 일종)로, 필리핀에선 망고로 김치를 담근다.
입맛이란 어찌나 끈질긴지, 그 질긴 본능으로 어디서든 온갖 식물에서 김치의 가능성을 발견해낸다. 어디서든 김치를 만들고 나눠먹는다. 김치를 먹는다는 원형적인 감각과 의식이 이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끈끈하고도 단단한 정체성을 마주할 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진다. 이 감정에 가까운 단어는 뭘까.
민족? 그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이 글도 민족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열었지만, 입맛의 공동체에 담긴 본능과 감각은 이 개념어의 범위를 초월한다는 느낌이 든다. 한없이 굴절되지만, 동시에 원형적인 삶. 원형을 간직하지만, 굴절되는 삶. 지류이자 본류가 되는 이 모든 삶을 뭐라고 부를까. 김치란 무엇일까.
지난달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 들렀을 때 든 생각이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이 모여 사는 이곳을 취재차 찾았다. 가장 먼저 만난 분이 우즈베키스탄 3세이자 고려인마을 대표인 신조야 씨(68)였다. 오전에 고려인마을회관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얘기 나누려면 가운데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인심 좋게 맞아줬다. 졸지에 식탁에 앉았다.
김치란 무엇인가
러시아식 홍차와 빵, 복숭아잼과 당근으로 담근 김치가 놓인 식탁이었다. 신 씨는 당근 김치를 가리키면서 우즈베크에선 김치하면 이걸 먼저 떠올릴 정도로 보편적인 메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이젠 워낙 당근 김치가 많이 알려져서, 담그는 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토요일 오후엔 당근 김치 만들기 체험을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회관에서 일하던 고려인분들이 식탁에 합류했고, 메뉴가 늘었다. “이것도 드셔 봐요” 신 대표가 기자에게 파파야 샐러드 비슷한 걸 권했다. “수박 껍질 안쪽의 하얀 부분 있죠. 그걸로 담근 김치입니다.”
기자가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 방문한 12일. 고려인마을지원센터(회관)에서 다양한 김치를 소개했다. 오이지와 토마토 김치가 가운데 있고, 수박김치와 백김치, 명태식해 등이 놓여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접시들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이게 무슨 김치냐고 묻고 있었다. “그건 토마토 김치요.” 언제부터인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화가 문 빅토르 씨가 말했다. 세상에 토마토 김치가 있느냐는 말에 그가 웃었다. “카자흐스탄 토마토는 소의 심장만큼 큽니다. 카자흐스탄, 토마토 김치. 흔합니다.”
그러자 식탁에 앉은 고려인 네 분은 중앙아시아 과일과 야채가 얼마나 맛있는지로 화제를 옮겨갔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가 오가고, 가끔 신 씨가 나의 존재를 잊지 않고 무슨 말인지 통역해준다. “방금 참외는 우즈베키스탄이 최고라고 말했어요. 그냥 먹어도 맛있고 김치로도 맛있어요.” 그러곤 앞에 있는 접시를 가리킨다. 이것도 참외로 만든 김치라면서.
“우즈베크 참외 중에선 거의 1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얼마나 단지 몰라요. 안 그래?” 신 씨가 옆에 있는 30대쯤 돼 보이는 고려인 이웃을 보며 말했다. 자신과 같은 우즈베크 출신이라며. 그러자 그 이웃이 잠시 어떤 생각엔가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식사하는 내내 러시아말만 하던 그가 잠시 침묵을 흘려보낸 뒤에 말했다.
“맛있나요?” 내가 다시 물었다.
“맛있어.” 그가 반복해서 대답했다. 혀에 붙어있는 말은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