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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진성이가 대학을 나왔으면요, 최하 장관이랑께요” 트로트 스타 진성 칭찬에 인생이 행복한 배우 김성환[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입력 | 2024-08-03 16:00:00

[19] ‘탤런트 중의 탤런트’ 배우 겸 가수 김성환-‘트로트계의 BTS’ 가수 진성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은어, 속어죠.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탤런트 겸 가수 김성환(오른쪽)에게 트로트계의 거물 진성은 아주 특별한 동생이다. 무명의 설움에 시달리던 진성이 안쓰러워 곁을 내주며 보살폈는데, 이제는 40년 무명 설움을 딛고 국내 최고의 트로트 가수로 올라섰다. 그 기쁨과 보람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고양=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만능 연기자 겸 가수 김성환(74)은 연예계에서 바르고, 성실하고, 자상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재주도 많다.

우선 본업인 연기력이 일품이다. 그의 연기를 보면 우리네 삶과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어 공감이 간다. 청국장 같이 구수하고, 향기도 오래간다. 입담도 탁월해 앉은 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기 일쑤다. 약장수, 뱀장수 흉내라도 내면 모두 자지러진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잘 섞이고, 둥글게 둥글게 “남에게 옥 먹을 짓을 하지 말자”며 구김 없이 살아온 덕에 55년차 연예인이지만 조그만 구설수 하나 없다. 덕분에 연예계에서 그는 위 아래로 모두 통한다. 선배들은 그의 연락을 마다하지 않고, 후배들은 줄을 서서 그를 기다린다. ‘연예인의 연예인’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에게 유난히 아프고, 애지중지 다루는 손가락이 하나 있다. 트로트 가수 진성(64)이다. 40년 가까이 지켜본 동생이자 무명시절 수많은 곡절을 겪었던 동생이다. 그가 어려울 때마다 같이 아파하고 돌봐주고 살펴주었다.

그런데 지금 진성은 국내 트로트계에서 BTS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무명의 설움을 딛고 최정상에 선 동생의 행보는 감탄을 넘어 존경의 경지다.

지난달 25일 두 사람이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에 만났다. 점심을 같이 하며 지난 시간을 되짚는 두 사람에게서 형제 이상의 우애와 사랑이 느껴졌다.

둘의 대화는 동생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했다. “진성이, 이 놈이 초등학교만 나와서 그렇지 대학을 나왔으면 최하 장관이에요. 얼마나 머리가 비상한지 몰라요. 초등학교를 2년인가 다니다 말았는데 참 진성이가 말을 맛있게 잘해요. 똑똑해요.”

김성환이 진성을 만나면 자판기처럼 내뱉는 말이다. 진성이 계속 힘든 삶을 살았다면 꺼내기 어려운 얘기다. 그런 김성환을 보며 진성도 잊고 싶었던 과거를 소중한 추억처럼 기억하고, 스스럼없이 꺼낸다.


● “형님의 밤무대 포스터는 내 인생 길라잡이”
1980년대 초중반 연예계에서 김성환은 ‘밤무대의 황제’로 불렸다. 현재 2040세대가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다. 잘 나가는 탤런트가 굳이 야간업소에 나간다는 게 믿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방송 출연 말고 수입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 무엇보다 밤무대에 서는 일이 당시 연예인들에게는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었다. 김성환은 1970년 TBC(동양방송) 10기 탤런트 출신으로 주말드라마 주인공까지 맡았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회사가 사라지면서 출연 횟수가 점점 줄었고 수입도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그는 8남매의 장남이었다.

처음 야간업소에서 파격적인 출연료를 앞세워 무대에 서줄 것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김성환은 거절했다.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으로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연할 드라마가 줄어들고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지면서 생각을 바꿨다.

처음 찾은 곳은 서울 중구 무교동 ‘엠파이어’ 클럽이었다. 직접 찾아가 염치 불구하고 출연을 사정했다. 하지만 “무작정 무대에 올릴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클럽 실무자 연예부장과 실랑이 끝에 며칠만 일하는 조건으로 무대에 올랐다.

김성환은 전라도에서 상경한 사람으로 변신하기로 했다. 하얀 바지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구수한 사투리로 창도 하고 노래를 부르면, 손님들의 시선을 끌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내가 시방 전라도에서 올라왔는디, 나도 노래 한 자리 하세. 내가 이래봬도 우리 동네에서 남진이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고 소문난 놈이여. 전국노래자랑 나가가꼬, 내가 최우수상을 받을 뻔 했는데 어떤 놈이 빽을 써가꼬, 장려상으로 밀려버렸어.”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에 가요 메들리로 이어지는 그의 퍼포먼스는 대박을 쳤다. 이후 ‘김성환의 원맨쇼’로 서울지역 업소들을 접수했다. 한창 때는 하루에 16개 업소 무대를 소화했을 정도다.

이때 그와 진성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3살 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부모 없이 홀로 자란 진성은 상경한 뒤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하다 야간업소 가수로서 성공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밤 무대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고 들었다. 이 무렵에 동생(진성)은 어떻게 지냈나?

“17살 때는 자장면 배달을 하고, 리어커를 끌면서 과일도 팔았죠. 18, 19살 때는 부잣집만 있다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 댁에 벨을 누르고 변중석 여사님께 과일도 팔았습니다.

장사 초기에는 동네 시끄럽게 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도 제대로 된 과일만 들고 팔았어요. 나중에는 동네 어머니들을 전부 단골로 만들었죠. 몇 년씩 장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6개월 만에 동네를 평정했어요. 목소리 깔고 ‘자, 과일이~ 왔어요’ 하면 전부 나왔어요.

그러다 1979년에 처음으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습니다. 처음 간 곳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 있는 ‘서울 카바레’였어요. 강남 영동호텔이 생기기 전이에요. 거기 밴드 마스터가 배우 정한용 선생의 동생이었어요.

제가 당시 19살이었요. 미성년자라 출입할 수 없잖아요. 나이를 올려 들어갔죠. 거기서 성환 형님을 만난 거예요. 당시 형님은 무조건 100만 원 이상을 받았고, 저는 한 달에 30번을 찍어야만 30만 원을 받았어요.”

김성환이 하는 일이라면 만사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동생 진성. 진성은 김성환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 자기 것을 아낌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김성환 제공



-무명가수가 김성환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죠. 하늘 같은 선배이기도 하고, 저는 업소 한 곳도 제대로 서기 어려울 때였어요. 당시에는 형님이 메인으로 나온 홍보 포스터가 곳곳에 도배되다시피 붙어 있을 때였어요. 부러운 존재였고 벽이 느껴졌죠.

그런데 처음 마주친 형님은 인간미가 있으셨어요. 보통 유명세가 있는 연예인과는 달리 포근한 눈빛과 말로 대해주셨습니다.

무대에서는 대단하셨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웃음으로 기가 막히게 돌려 놔요. 주특기에요. 노래도, 입담도 재주가 많으셔서 너무 부러웠어요.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저렇게 형님처럼 살아야겠구나’, ‘나이를 먹어도 형님과 같은 삶을 살자’하는 생각도 갖게 됐고요.”

그에게 인사를 하는 진성에게 김성환은 처음부터 눈길이 갔다. 무명생활의 설움을 겪어봤기에 진성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전북 군산이 고향인 그에게 진성이 전북 부안 출신이라는 점도 정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곳저곳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를 소개하고, 부탁했다. 전국 각지의 행사에서 설운도, 태진아, 현철 등 당시 유명 가수의 ‘땜방 가수’로 그를 불러주기도 했다.

“땜방가수는 유명 가수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못 나올 것을 대비해 준비하는 가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해당가수가 나오지 않아야 돈을 받는 구조에요. 당시 진성이가 대기를 했지만 해당가수가 출연하는 바람에 돈을 받지 못한 적도 많았어요.”


-땜방가수’ 자리도 형님이 주는 콩고물이라며 고마워 했하던데….

“만약 그 때 진성이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했다면 가수로서의 길은 끝났을 거예요. 아쉬움과 절망감을 이겨내고 노래를 계속했기에 오늘의 진성이 있는거죠.”

1994년 진성은 〈님의 등불〉로 인생 첫 음반을 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다른 가수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엮어 부르는 메들리만 했던 무명가수였다. 김성환은 그에게서 무명이라는 타이틀을 지워주고 싶었다.


-〈님의 등불〉이 나올 형님이 해준 말이 있나?

“당시에는 디스코풍의 트로트 노래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시되던 때였어요. 저는 뭔가 특이하게 만들고 싶어서 펑키 리듬으로 스타일을 잡고 불렀죠. 형님이 들어보시더니 ‘이 노래 괜찮다. 민요 같기도 하고, 창 같기도 하고, 너하고 색깔이 잘 맞는다’고 자신감을 주시더라고요.

그 뒤로 행사장에 가면 저하고 〈천년바위〉를 부른 박정식을 같이 불러 밥도 사주셨어요. 나중에는 본인에게 들어온 행사에 저희 둘을 묶어 한 팀으로 출연도 시켜줬어요. ‘돈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일단 무대에서 서야할 것 아니냐’며 많이 끌어주셨죠.”

김성환은 1992년부터 진행하던 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9595쇼’에도 진성의 노래를 많이 틀었다. 음반을 내고도 인기를 얻지 못해 실의에 빠졌던 진성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형님 진성 씨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사실 형님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C지만 노래를 선택하고 방송할 권한은 없거든요. 편파 논란이 나올 수도 있어서 PD에게 부탁하기도 어렵죠. 대신 PD들에게 제 노래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고 해요. 저에게도 힘이 될 얘기를 많이 해주셨고요. ‘한우물을 파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라고.

성환 형님 얘기를 듣고 남진 선생님도 ‘언젠가는 너한테 기회가 와야. 너는 노래를 잘해버리니께 일단 버텨버려라’고 격려를 세게 해주셨죠. 남진 선생님은 연말 디너쇼 행사 할 때도 저를 무대에 세워주셨어요.”


〈태클을 걸지마〉로 무명 가수 탈출의 시동을 걸고 〈안동역〉의 역주행으로 일약 트로트 정상 가수 반열에 올라선 진성. 출처=KBS 가요무대 유튜브 캡쳐.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마침내 진성은 2005년 발표곡 〈태클을 걸지마〉로 무명에서 탈출하게 됐다. 이어 2008년 내놓은 〈안동역〉이 4년 후 역주행하면서 빅히트를 쳤다. 그 덕에 반지하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성이 부친의 산소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다 번쩍 든 아이디어로 만든 〈태클의 걸지마〉의 탄생 스토리는 〈안동역〉이 인기를 얻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성환도 당시를 떠올리며 감동을 떠올렸다. “야~그 노래가 그렇게 뜰 줄을 몰랐어. 〈안동역〉이 뜰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안 했지. 진성이 돈 벌어서 지하 방 벗어났다는 얘기 듣고는 정말 기뻤어야.”

진성도 맞장구를 쳤다. “형님 보고 인생을 따라간 덕이죠. ‘김성환’은 진짜 이 진성의 ‘길라잡이’십니다.”


● 〈묻지 마세요〉를 진짜 묻지 않고 형에게 준 동생
이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끈끈한 관계에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생의 지극한 형님 받들기도 있었다.

“절대 가수들이나 작곡가가 자기 노래를 누구한테 쉽게 주는 법이 없어요. 안 부르고 썩고 있어도 안 줘요. 그런데 진성이는 자기가 정말 애착을 갖고 부르려고 했던 곡을 줬어요.”

배우이면서 노래 실력이 출중한 김성환은 동생 덕에 2014년, 만 64세 나이로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그 전에도 김성환은 각설이 타령, 품바 등과 같은 앨범을 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제대로 된 히트곡 하나를 갖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진성이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녹음까지 마친 곡 〈묻지 마세요〉를 준 것이다.


진성에게서 받은 노래 〈묻지 마세요〉를 맛깔나게 열창하고 있는 김성환. 출처=가요베스트 캡쳐.




〈묻지 마세요〉

묻지 마세요
묻지 마세요 물어보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흘러간 내 청춘 잘한 것도 없는데
요놈의 숫자가 따라 오네요
여기까지 왔는데
앞만 보고 왔는데
지나가는 세월에 서러운 눈물
서산 넘어가는 청춘
너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노래를 준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제가 직접 만든 노래에 대한 애착이 다른 가수보다 제가 참 많아요. 〈묻지 마세요〉도 〈안동역〉에 이어 히트하겠다고 생각하고 녹음까지 마친 곡입니다. 그런데 형님이 들어보시고 ‘야, 노래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선뜻 드렸지요. 그런데 노래가 ‘빵’ 터졌어요. 형님이 노래 잘하는 배우에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세우셨어요.”


-인기는 있었나?

“이 노래는 ‘준히트’ 정도는 했어. 진성아. 진짜 가수는 노래 한 곡이 터지는 게 중요하더라고. 정말 고마운 노래야.”

실제로 이 노래는 2016년 6월 대한노래지도자협회가 선정한 성인가요/트로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동생이 형님에게 진 빚을 갚은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죠. 형님에게 주는 건 아깝지가 않습니다.”

“아니야. 〈묻지 마세요〉가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을 찾게 된 계기가 됐어.”


-두 사람에게 두고두고 안주거리로 삼을만한 인생 스토리가 생긴 것 같다?

“정말 그래요. 형님이나 저나 이 스토리를 갖고 팬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줄 수 있게 됐어요. 어디 나가서 그래요. ‘원래 형님한테 〈묻지 마세요〉는 4년만 쓰고 돌려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형님이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농담을 해요.그러면 팬들이 재밌어 하세요.

그래서 거기서 한 발 더 나갔죠. 이 문제를 형사사건으로 해결할지, 민사소송으로 풀지. 하하. 어떻게든 반환 청구 소송을 해야할 것 같다고 하면 관객분들이 ‘소송하지 마세요’라고 해요.

제가 소송을 걸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분명 들을 것이고요. 아직 형님하고 합의는 안 됐는데, 요것 때문에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하하.”


● 값진 훈계로 동생의 초심을 보호하는 형

지금 돌이켜 봐도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일도 있었다. 40년의 지긋지긋한 무명생활을 청산하고 스타 탄생의 문턱에 섰던 진성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 것이다. 당시 김성환은 동생을 빨리 데려가려는 하늘이 무심하다 싶어 원망했다.

그 일은 진성이 〈안동역〉에 이어 〈보릿고개〉로 트로트계가 인정하는 대형 스타 가수로 자리매김하려던 2016년 혈액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평생 고생만 해 슬픔과 한을 되새김질하는 노래만 했던 동생이었는데, 하늘이 또다시 시련과 고난을 주는 건가 싶었다.

“암이 게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제가 당시에 이 병원, 저 병원 알아봐주고 했는데 제일 안타까운 건 심장판막증까지 함께 발견된 겁니다. 수술을 해야하는데 마취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생살을 뜯어내고 수술을 한다? 게다가 몇 번씩 기절을 했다는데 정말 내가 겁나고 힘들더라고요. 항암 주사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누워 있는 것 같았어요. 일찍 사고로 세상 떠난 내 친동생 생각도 떠올랐고….”

“림프종 혈액암과 심장판막증이 한꺼번에 왔을 당시 저는 마음 속으로 생을 포기했습니다. 심각했죠. 대학병원을 예약해놨는데 형님이 거기보다는 다른 병원이 낫지 않겠냐며 신경을 써주셨어요.”

이후 기적적으로 항암 치료가 잘 돼 진성은 퇴원을 했고, 김성환은 그에게 두둑한 용돈을 쾌척했다. 병마를 이겨낸 모습이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형님한테, 그 전에도 크게 해드린 건 없지만 만날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작게나마 성의 표시를 하려고 해요. 형님한테는 뭘 드려도 아깝지가 않아요. 친형 이상으로 형님한테 제 마음을 드리는 거죠.”

김성환은 어렵게 쌓은 진성의 인기와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평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초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고양=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김성환은 그 당시 삶의 끈을 놓지 않은 동생을 존경한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지금의 인기와 명예를 꼭 지켜주고 싶다. 동생 진성은 이제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걸출한 스타이기 때문이다. 만날 때마다 동생에게 초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진성 역시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다.

“항상 무명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변하면 안 된다’, 딱 그러세요. 이제 돈벌이가 되니까 제가 조금 비싼 시계 같은 것 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비싼 물건을 그렇게 쉽게 사는 것 아니다. 그런 시계 찬다고 사람들이 너를 위대하게 보는 것 아니다. 시종일관 니가 어렵고 힘들었던 때의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인기도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훈계처럼 말씀해주세요.

살다보면 이런 점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가르침을 주시는거죠. 시련과 고난이 나에게는 축복이라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형님 때문입니다.”

2020년 라디오 DJ로 마지박 방송을 했던 김성환을 응원차 찾아온 진성. 출처=TBS 라디오 인스타그램




● 숙성된 달인들의 크로스오버, 악극에 도전하는 형제
두 사람은 10살 터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챙길 수 있는 관계가 됐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복 받았다고 말해주고 싶고, 잘 참고 잘 살았다, 버텨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고 싶은 사이다.

“동생이 형한테 잘하니 오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

“형님을 오래 보고, 배우고, 형님 편에 서서 거리감을 좁히다보니 이제 형님과 ‘레벨’을 맞출 수 있게 됐지라. 정말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죠.”

바쁜 스케줄로 연락은 자주 하지만 만나는 건 쉽지 않다. 그래도 만나면 주변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고 우정을 뽐낸다. 둘만 있으면 오랜 밤무대 활동에서 다져진 둘만의 노래와 입담, 온갖 재치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나가 척하면 나머지가 툭하고 받는다. 이러자고 약속한 적이 없는 데도 바로바로 가능하다. 그래서 더 재밌고, 의미가 크다.

동생이 무명 가수로 어려웠던 시절, 김성환은 태진아(오른쪽)의 ‘땜방 가수’로 진성의 일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했다. 이제는 세 사람은 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이가 됐다. 김성환 제공

“어제도 형님하고 통닭집에서 재밌는 쇼를 하고 왔어요. 통닭집에서 우리한테 CF를 주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분위기를 만들어줬어요.”

“통닭집에서 팬사인회를 하고 왔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순간 진성이한테 자연스럽게 ‘야, 안동역 잘 부르고 왔냐? 피곤해 보이네. 수고했다. 몸 보신하러 가자’라고 멘트를 쳤잖아. 그리고 진성이하고 뭔가를 뜯고 있는 데 그게 통닭인거지. 하하.”

최근 행사에서 사인회를 하고 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두 사람. 출처= 진성 인스타그램

두 사람의 화학적 반응에 사람들의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둘이 만나 편하고 좋은데, 이를 즐기는 팬들도 기뻐하니 일석이조다.

주변에서도 두 사람의 능력을 합쳐지면 좋은 시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성환은 좌중을 압도하는 입담의 달인으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 그 덕에 방송 MC나 라디오 DJ도 숱하게 맡았다. 〈전국노래자랑〉 MC 제의도 여러 번 받았다. 진성은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대중과 교감이 제일 잘 되는 특급 트로트 가수로 손꼽힌다.

두 사람도 이런 사실을 안다. 그래서 둘의 능력을 합해 인생과 생활속 연기, 노래로서 팬들과 호흡하는 악극을 계획 중에 있다.

“진성이가 능글능글하게 말을 잘하거든요. 저하고 연습한 것도 아닌데 평소에도 말 궁합이 잘 맞아요. 진성이도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싶어하고, 저는 노래를 더 하고 싶고요.”

“저는 가수라 기본적으로 노래를 잘해야지만, 추가로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엇’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김성환의 장기 가운데 하나가 엄지와 검지를 튕기고 동시에 양 손바닥을 비비면서 ‘딱딱’ ‘쭉쭉’ 소리를 내며 리듬을 만들고, 이에 맞춰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김성환의 손장단에 맞춰 진성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고양=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두 사람의 미래 계획을 들으며 국내 연예계에서 듣도 보도 못한 초유의 콤비가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됐다. 얘기 중간중간 두 사람이 서로을 바로 보는 눈빛에서 앞으로 우정이 단단해질 수 있겠다는 강한 느낌도 전해졌다. 평생 깐부로서 께 무대에도 서고 싶다는 김성환과 진성. 대한민국 연예계를 강타할 사람의 로맨스가 그려낼 미래는 그래서 ‘묻지마세요’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