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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강제징용 피해자에 “재원 마련 기다려달라”… 멈춰선 ‘제3자 변제’

입력 | 2024-08-05 15:29:00



“(배상금 지급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A 씨 유족의 법률대리인은 올 2월경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 관계자와 면담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대법원에서 이긴 A 씨는 일본 기업 대신에 국내 행정안전부 산하 재단으로부터 배상을 받는 ‘제3자 변제’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재단 측이 “재원이 부족하니 재원을 마련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6개월 가까이 흘렀지만 A 씨 측은 재단으로부터 배상금 지급 관련한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일본 기업을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국내 재단이 대신 배상하는 ‘제3자 변제’가 재단의 재원 부족 때문에 잠시 멈춰선 것으로 파악됐다.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 120명에게 재단이 지급해야 할 금액은 5일 기준 총 133억여 원 수준인데, 재단에 남아 있는 돈은 필요 재원의 11%인 15억여 원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 133억 필요한데 남은 돈은 15억 원

5일 기준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 124명(소송 원고 기준) 중 제3자 변제를 받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를 밝힌 피해자는 총 4명이다. 이들을 제외한 120명에게 재단이 지급해야 할 배상액은 총 133억 4232만여 원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 원금이 59억여 원이고, 배상금 지급이 지연된 데 따른 지연 이자가 74억여 원이다. 동아일보가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의 1·2·3심 판결문을 입수해 원금과 지연이자 액수를 계산한 결과다.

피해자 상당수는 ‘제3자 변제’를 받아들여 재단으로부터 배상을 받겠다는 뜻을 재단 측에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이 연락이 닿는 피해자 가족들을 상대로 의사를 확인한 결과 90%에 가까운 인원이 “제3자 변제를 받을 의향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현재 재단에 남아 있는 돈은 15억여 원 안팎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이 지난해 3월부터 올 1월까지 국내외 단체와 개인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은 총 41억 6345만여 원인데, 재단은 이중 25억여 원을 징용 피해자 11명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급한 상태다.

재단은 2018년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소한 징용 피해자 15명 중 11명에 대해 ‘제3자 변제’ 방식으로 배상금을 지급했고, 나머지 4명에 대해서는 법원에 배상금을 맡기겠다며 공탁을 신청했다. 법원이 재단의 공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단이 이에 불복해 이의 신청을 내면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법원이 재단의 공탁 신청을 받아들일 경우에는 공탁금으로만 총 12억여 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탁금을 제외하면 재단의 가용 현금은 3억여 원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재단은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잠시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에 남아 있는 돈으로는 최대 2~3명에 대해서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데, 전체 피해자 중 특정인에게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배상금 지급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일부 피해자들은 최근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에 “약속한 배상금 지급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며 민원까지 제기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한 피해자는 최근 가까운 지인에 “판결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더 나았다”는 얘기를 전달했다고 한다.

● ‘제3자 변제’ 1년 5개월 넘겼지만 포스코 제외 한일 기업 기부는‘0’

이런 일이 벌어진 건 한일 기업의 기부금으로 재단의 재원을 충당하겠다는 정부와 재단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해 3월 정부는 재단의 재원을 국내의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의 자발적 기여를 통해 확보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정부 발표 직후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인 포스코가 재단에 40억 원을 기부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 5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다른 기업들은 기부금을 출연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 기업의 기부도 없었다. 기업들은 “한일 청구권 협정 이후로 합병과 분사를 거듭했고, 이 때문에 협정의 수혜기업인지 분명치 않다”, “충분한 법적 근거 없이 기부금을 출연하면 향후 배임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출연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연 이자’는 시간이 지날 수록 불어난다. 재단이 ‘제3자 변제’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재원의 액수가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 결과, ‘제3자 변제’가 계속 미뤄져 재단이 올 12월 31일 배상금을 지급할 경우 지급해야 하는 총 금액은 133억여 원(8월 5일 기준)에서 136억여 원(12월 31일)으로 늘어난다.

일본 기업의 국내 특허권, 주식 등을 매각해 배상금으로 지급해 달라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낸 ‘특별현금화 매각명령’ 소송도 최소 10건 중 7건이 취하되지 않고 그대로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제3자 변제’를 수용한 뒤 법원에 소 취하를 신청한 건수는 3건에 불과했다. 법원이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징용 피해자에 배상금으로 지급하라는 ‘현금화 결정’을 막기 위해 정부와 재단이 ‘제3자 변제안’을 고안해 냈지만, 막상 ‘현금화’라는 한일 관계의 시한 폭탄은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