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고대 사회에 물물교환은 있었지만 교환된 물건은 의례로서의 선물이지 돈을 주고 사고파는 거래로서의 ‘상품’이 아니었다. 오늘날 상품을 주고받는 관계처럼 이윤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스가 밝힌 고대 사회의 증여는 상품 거래와 다른 호혜성의 원칙에 근거한다. 등가물을 전제로 한 호혜적 선물 교환은 고대 사회의 존립을 보장하는 일종의 집단적 의사소통의 지혜였다. 선물을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급부와 반대급부는 자발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의무로 규정되었다. 선물을 받았으면 반드시 갚아야만 되며 이러한 상호성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족 간에 분쟁이 발생한다.
북서부 인디언의 포틀래치는 경쟁적인 선물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족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부족에게 선물을 하고, 경쟁자는 더 큰 선물을 하거나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응전하였다. 주기, 받기, 답례하기 가운데 하나라도 거부하면 전쟁 선포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증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그렇다면 왜 베풂과 나눔이 경쟁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인가? 그것은 결코 남을 위한 선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선물 문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에 초대받아 부조금을 내는 일은 상부상조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부조는 자발적이면서도 의무적인 행위다. 고대의 귀족이 존경과 명예 같은 정신적 가치를 얻으려고 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성급한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근거한 고대 귀족주의의 문화가 소유와 탐욕에 찌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부를 축적한 기업이 이익의 일부를 사회로 환원하여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경쟁 원칙을 버리고 고대 귀족주의의 노예 제도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만으로 사회적인 불평등, 양극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사회적 평판, 신뢰, 명예가 돈의 많고 적음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나누고 베푸는 일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선은 부자에게 강제할 수는 없고 자신부터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