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여당이 DJ정부 때 6건 탄핵 발의해 압박 민주당, 尹정부 들어 18건 남발 ‘탄핵 정치’ ‘유권자가 정부 심판’ 민주주의 원리 무력화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현재 한국은 가히 ‘탄핵 민주주의’라 부를 만하다. 최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워낙 자주 발의되다 보니 피소추자가 누구인지 전부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가장 최근 이진숙 신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임명 이틀 만에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 정지된 것을 비롯하여 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상인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 야권 인사가 관련됐던 사건 담당 검사 4명(엄희준 박상용 김영철 강백신),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 등 총 7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바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서 검색해 보면 지난 6대 국회에서 탄핵심판법이 통과된 후 22대 국회까지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것은 총 40회였다. 미국의 경우 260년 역사에서 연방의회 탄핵 심판은 우리의 절반 수준인 총 21건이 있었다. 이 중 1900년대 이후는 13건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0여 년만 고려하면 8건으로 우리의 약 5분의 1 수준이었다. 한국은 ‘탄핵 과잉’으로 보인다.
피소추자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검찰 또는 사법부 인사에 집중되었다. 전체 40건 중 검찰총장을 포함해 검사가 21명, 대법관 포함 법관이 4명으로 무려 63%에 달했다. 피소추자의 사법부 집중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도 전체 21건 중 대법관 1명 포함 법관이 15건(71%)으로 대다수(대통령 4건, 장관과 상원의원 각각 1건)를 차지했다. 다만 검사는 한 명도 없었다. 두 나라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탄핵 심판 사유였다. 한국의 경우 피소추자가 된 검사와 법관 대부분의 탄핵소추 사유가 담당했던 사건이나 재판과 관련성이 있어 정치적 성격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현 여당이 신승남, 박순용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을 때도 당시 진행 중이던 선거 관련 사건의 처리 등이 이유였다. 반면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상원의 탄핵 심판 대상이 된 법관 전원이 조폭(앨시 헤이스팅스)이나 변호인(토머스 포티어스 주니어)으로부터의 뇌물 수수, 성추행(월터 닉슨), 고의적 세금 포탈(해리 클레이번) 등 개인 비위가 탄핵 사유였다.
반면 전체 40건의 탄핵소추안 중 절대다수인 30건(75%)은 현 야당, 나머지 10건은 현 여당에서 발의한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탄핵’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원조는 현 여당이었으나 ‘탄핵 정치’를 만개시킨 것은 민주당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4건)에서도 유사한 탄핵 정치 기조가 이어지다가 이명박(1건), 박근혜(2건) 정부 시절에는 극단적 여소야대 지형이 아니어서인지 탄핵소추안 발의가 뜸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다시 6건으로 증가했고 현 정부 들어서는 임기 절반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이미 무려 18건이다. 현재의 극단적 여소야대 지형, 야당이 공공연하게 대통령 탄핵 추진을 언급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윤석열 정부 후반기에도 줄어들 기미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탄핵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언제든 꺼내 들 수 있는 ‘최애’ 전술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던 윤석열 대통령 정부 출범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본격적인 ‘탄핵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고 대통령 탄핵 청문회까지 진행 중이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입법부가 행정부의 임명권을 제한하고 심지어 선거를 대체하는 ‘뉴노멀’이 도래하리라는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뉴노멀’하에서는 행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고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평가받는다는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원리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22대 총선에서 21대 국회 때 무려 12건의 탄핵소추안 발의를 가능케 했던 극단적 여소야대 구도의 강화를 선택했다. 과거 20%대 초반으로 추락한 대통령 지지율과 국회에서의 여소야대 구도만 믿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 새천년민주당과 새누리당에 역대급 총선 참패를 안겨준 고도의 유권자 균형감각과 합리성도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포퓰리즘으로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모두가 ‘뉴노멀’에 익숙해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