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부국장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에 대한 워싱턴 정가의 초기 평가는 꽤 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전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 몇 명이 연달아 사표를 쓰자 ‘부통령실의 대탈출(exodus)’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업무 역량에 리더십까지 도마에 오르면서 “사람을 품을 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의 발언을 일일이 분석해 ‘말비빔(word salad)’ 화법이라고 비판하는 논평들도 있었다. 핵심이나 논리 없이 그럴싸한 수식어들만 두서없이 섞어 놓는다는 지적이었다.
‘反트럼프 결기’가 밀어올리는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실권이 많지 않아 언론이 관심 자체를 별로 두지 않는 자리다. 그런 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 ‘백인 남성이었어도 저랬을까’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혼혈이자 여성인 해리스 부통령을 향한 여러 비판에 대해 실제로 당시 부통령실은 “인종주의에 성차별적 시각”이라고 발끈했다.
그냥 된 것은 아니다. 해리스의 당선을 위해 민주당의 내로라하는 선거전략가와 소셜미디어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 당 지도부는 총력전으로 뒤를 받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보자며 여성계가 다시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큰손 후원자들이 속속 지원에 나서 거액의 캠페인 자금을 대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달 모금한 선거자금만 우리 돈으로 4000억 원이 넘는다. 무서운 결집 속도다.
이런 움직임의 밑바탕에는 트럼프에게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대로 끝이라는 민주당 인사들의 토로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대선 번복 시도와 기밀문서 유출, 성추문 입막음 등 91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트럼프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결기가 가득하다. “트럼프는 위험하다”며 그의 역량과 자질, 도덕성 문제를 조목조목 짚은 뉴욕타임스의 이례적으로 긴 사설도 배경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칼럼니스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 빗대 ‘담대한 절박함(the audacity of desper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절박함이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결정을 이끌어냈고, 이제 ‘비(非)백인 여성 대통령’이라는, 민주당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좁게나마 뚫어내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누구든 당선시켜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해볼 만하다”는 인식이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면서 패색이 짙었던 민주당에는 다시 활기가 돌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승리의 간절함이 한계를 강점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매력보다는 “상대 후보만은 절대 안 된다”는 판단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구도가 선거의 정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스의 등판은 순식간에 대선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거의 역사를 쓰는 과정이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건재한 미국의 역동적인 민주주의 현장을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