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동아일보와 대한적십자사는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재한 원폭 피해자, 강제징용 사할린 동포, 고려인과 3회차에 걸쳐 ‘동행’하며 상처를 딛고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지난달 15일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이수용 할머니. 합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경남 합천군에 사는 이수용 할머니는 1928년생. 올해로 아흔여섯입니다. 이젠 몸이 약해져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방금 무슨 질문이었냐고 되물으며 기자 쪽을 향했습니다.
그날.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녹아내린 도로와 건물. 불에 탄 채로 길에 늘어선 시신들. 다른 기억이라면 가물가물하다던 할머니의 눈빛은 또렷해졌습니다.
지난달 15일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이수용 할머니. 합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서 함바집(간이 식당)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왔던 한국인 소녀. 주산에 밝았던 열일곱 이수용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히로시마 저금국에서 사무를 봤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여느 때처럼 거기 있었죠.
그리고 소녀의 삶을 뒤바꾼 건 그날 단 한 번의 섬광이었습니다.
주저앉는 듯한 굉음. 놀라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이 번쩍했답니다. 건물이 흔들리고 소녀는 쓰러졌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사무실은 엉망진창에 온통 피범벅이었습니다. 여길 벗어나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어났을 땐, 창문에서 쏟아져 내린 유리가 왼쪽 발등에 박혀 있었고요.
합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제때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 곧 일본에 미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여자들을 다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미 그런 위협을 겪어본 할머니 가족은 화들짝 놀라 딸을 지키기 위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부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들에게 치료를 지원할 때 이들 가족은 그런 지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갔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계신 이곳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내 다른 한국인 피해자분들도 같은 얘기이더군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몰랐죠.”
이수용 할머니는 “지금도 왼발에 압박 스타킹을 신지 않으면 불편해서 걸을 수조차 없다”고 했다. 합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한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부산 남포시장에서 구제 옷을 팔고, 과일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때 다친 왼쪽 발을 끌면서요. 30여 년 전엔 암으로 인해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방사능 때문은 아닐까.’ 그런 피해를 개인이 스스로 입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합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폭이 떨어지고, 이틀 동안 69만 명(23만 명 사망)이 피폭되죠. 그중 무려 7만여 명이 조선에서 건너온 한국인이라는 점은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피폭 인원
사망자
전체
69만 명
23만 명
한국인
7만 명
4만 명
7만 명. 경기 과천시(8만5000명), 강원 속초시 인구(8만 명)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피해자 중에는 강제징용이나 학도병처럼 ‘직접적’으로 끌려오신 분들도, 가난 때문에 내몰리듯 건너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원폭 투하 당일부터 그해 말까지 한국인 피폭자 7만 명 중 4만 명이 숨집니다. 전체 피폭자 사망률이 33.7%인데 한국인 사망률은 57.1%에 달합니다.
왜 유독 한국인 희생자 비율이 높을까요? 당시 두 도시는 미국의 공습을 예상하고, 도심지역 내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작업을 펼쳤는데요. 이때 한국인이 많이 동원됐다는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두 도시 피폭 이후, 피해지역 구호와 복구 작업도 한국인이 많이 투입됐다는 피해자 증언도 남아 있습니다. 원폭에 직접 피해를 입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잔류 방사능 수치가 높은 곳으로 내몰렸다는 겁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있는 위령비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종이학이 놓여 있다. 히로시마=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내 강제 징용 한국인에 대한 징용 해제가 이뤄집니다. 그해 9, 10월에 한국인들은 피폭자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배에 오릅니다. 피폭 생존자 3만 명 중 2만3000명이 한국에 돌아왔고, 차츰 줄어 현재 생존자는 1876명. 평균 나이는 82.4세입니다.
한국인 피폭자 다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살 곳도 농사지을 땅도 없었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더라도 치료받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피폭 직후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합병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원폭 방사선 피폭에 의한, 이른바 ‘원폭증’을 앓으면서도,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켈로이드화된 피부 때문에 한센병(나병) 환자로 의심받아 일할 기회조차 못 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후유증 중 하나였던 극도의 무기력증(일본에서는 ‘부라부라 병’으로 불린다)으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누군가는 가난으로 인한 일본행은 자발적인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해요. 하지만 이 역시도 크게 보면 피식민지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제국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분명 무관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선 한일 양국 정부 차원의 대응도 물론 중요합니다. 일본 측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한국 정부도 실태 조사에 더 속도를 낼 필요가 있죠.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가운데, 피해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이 이뤄지기까지 민간 차원의 모금 등의 관심도 필요해 보입니다. 직접 피해자는 고령으로서 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7월 15, 16일 대한적십자사와 일본 나가사키현이 공동으로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등에서 진행한 국내 건강 상담에 동행 취재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다가 6년 만에 재개된 행사였죠. 이날 건강 상담 대상이었던 합천, 거창 일대에 거주하는 피해자들은 아래와 같은 증언을 하셨습니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김승자 씨(96) “ 9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남동생이 원폭으로 등이 싹 타서 죽었어요.”
이덕구 씨(89·오른쪽) “원폭 이후엔 머리가 깨질 듯이 자주 아파요. 근데 자식들도, 손주들도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해요. 피폭된 게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전삼덕 씨(87·왼쪽) “원폭 이후 몸이 계속 안 좋았어요. 한국에 와서는 이삭도 줍고, 남의 집에서 아기를 돌보며 살았어요. 자식 중 아들 하나 딸 하나는 쉰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위 사진 모두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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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임현석 기자 lhs@donga.com
거창=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