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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 종주국 자존심 살린 박태준의 ‘금빛 발차기’

입력 | 2024-08-09 03:00:00

한국, 파리올림픽 12번째 金



박태준(오른쪽)이 8일 파리 올림픽 남자 태권도 58kg급 결승전에서 돌려차기로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의 얼굴을 가격하고 있다. 박태준은 2라운드 종료 1분 2초를 남기고 기권승을 거두며 한국 선수단에 이번 대회 12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파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박태준(20)이 한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남자 태권도 58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태권도 역사에 새 페이지를 열었다. 이 금메달로 태권도 종주국 한국은 3년 전 도쿄 올림픽 ‘노 골드’의 불명예도 떨쳐냈다. 한국 선수단의 이번 파리 올림픽 12번째 금메달이다.

박태준은 8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태권도 남자 58kg급 결승전에서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를 상대로 2라운드 종료 1분 2초를 남기고 기권승을 거뒀다. 1라운드를 9-0으로 이긴 박태준은 2라운드 들어서도 마고메도프가 기권하기 전까지 13-1로 크게 앞서 있었다. 마고메도프가 1라운드 초반 발차기 도중 왼쪽 정강이 부상을 당하면서 박태준의 일방적인 경기로 흘러갔다.

박태준은 2021년 도쿄 대회에서 끊겼던 한국 태권도의 올림픽 금맥도 다시 이었다.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는데 한국이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도쿄 대회가 처음이었다.

박태준은 또 남자 58kg급에서 우승한 최초의 한국 선수가 됐다. 한국 태권도는 직전 도쿄 대회까지 금 12개, 은 3개, 동메달 7개를 땄는데 이 종목에선 금메달이 없었다. 이대훈 MBC 해설위원(은퇴)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 딴 은메달이 종전 최고 성적이었다.

박태준은 또 한국 남자 선수로는 16년 만에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이전까지 한국 남자 선수의 금메달은 2008 베이징 대회 손태진(68kg급)과 차동민(80kg 초과급)이 마지막이었다.



‘태권의 품격’… 다친 상대 위로-부축한 파리 윙크보이


[2024 파리올림픽]
박태준, 남자 58kg급 첫 금메달… 2R 종료 1분 2초 남기고 기권승
등 돌린 상대에 발차기하자 야유… “기권 전까지 최선 다하는 게 예의”
승자의 배려에 패자도 손 맞잡아… 롤모델 이대훈 “역사적 메달 축하”

박태준이 8일 파리 올림픽 태권도 남자 58kg급 결승전에서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를 꺾고 금메달을 딴 뒤 기뻐하고 있다. 파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파리 올림픽 대회 중반까지 펜싱 경기가 있었던 그랑팔레에선 7일부터 태권도 경기가 열리고 있다. 출전 선수들은 2층에서 대기하다가 선수 소개가 끝나면 긴 계단을 따라 1층 경기장으로 내려온다. 선수들이 입장하는 모습은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근사하다.

한국 남자 태권도의 샛별 박태준(20)의 등장은 특히 남달랐다. 앳된 얼굴의 박태준은 8일 남자 58kg급 결승전을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설 때 양쪽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흘러나온 노래는 가수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였다. 그리고 그는 노래 제목처럼 한국 태권도 역사에 한 페이지를 남겼다.

세계 랭킹 5위 박태준은 이날 결승전에서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26위)에게 2라운드 종료 1분 2초를 남기고 기권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태권도 종주국 한국은 3년 전 도쿄 대회 ‘노 골드’(은 1개, 동메달 2개) 불명예를 떨쳐냈다. 한국 남자 태권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딴 건 2008년 베이징 대회 68kg급 손태진, 80kg 초과급 차동민 이후 16년 만이다.

박태준의 금메달은 한국 태권도가 올림픽 남자 58kg급에서 차지한 첫 금메달이다. 박태준의 ‘롤 모델’인 이대훈 MBC 해설위원(32)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 획득한 은메달이 종전 최고 성적이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와 2021년 도쿄 대회 같은 체급에선 각각 김태훈과 장준이 동메달을 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박태준은 ‘이대훈 키즈’다. 이대훈을 ‘롤 모델’ 삼아 태권도를 했고 그의 후배가 되고 싶어 고등학교도 이대훈이 졸업한 한성고로 갔다. 2010년대까지 한국 남자 태권도 간판으로 활약한 이대훈은 세계 최정상급 선수였지만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런던 대회 58kg급에서 은메달을 땄고 리우 대회 때는 68kg급으로 체급을 올려 출전했는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대훈의 금메달 꿈을 대신 이룬 박태준은 “그동안 한성고엔 (이대훈 선배님이 딴) 은, 동메달만 있었다. 내가 첫 금메달을 따서 끼워 맞춘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박태준의 경기 TV 중계 해설을 맡은 이대훈은 “처음 봤을 땐 귀엽고 조그만 ‘아기’였다. 좋은 선수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은 몰랐다. 경기를 정말 몰입해서 봤다. 역사적인 금메달 획득을 정말 축하한다”고 했다.


상대선수 부상에 무릎 꿇고 걱정 박태준(왼쪽)이 8일 결승전 도중 부상으로 기권한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상태를 살피고 있다. 박태준은 마고메도프가 경기장에서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금메달 세리머니를 했다. 파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마고메도프와의 결승전은 보통 경기와는 다르게 전개됐다. 1라운드 초반 마고메도프가 발차기 도중 왼쪽 정강이 부상을 당해 박태준의 일방적인 경기가 이어졌다. 2라운드 때는 등을 돌린 마고메도프를 박태준이 발로 차 넘어뜨리는 장면도 나왔다. 관중석에선 한동안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태준은 “상대가 기권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배웠다. 일반 대회도 아니고 올림픽이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박태준은 경기 내내 상대를 배려했다. 마고메도프가 처음 부상당했을 때부터 경기가 중단될 때마다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고메도프가 기권한 뒤에도 박태준은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기 전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상태를 먼저 살폈다. 시상식에서도 다리를 절뚝이는 마고메도프를 부축해 시상대까지 함께 걸었다. 박태준이 보여준 ‘승자의 품격’에 마고메도프 역시 손을 맞잡으며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다.

준결승전에서 세계 랭킹 1위 모하메드 칼릴 젠두비(튀니지)를 물리친 뒤 관중석을 향해 윙크하는 박태준. 뉴스1

박태준은 “어릴 때부터 올림픽 금메달 하나만 보고 태권도를 해왔다. 지금도 믿기지 않고 꿈만 같다”며 “지금까지 이 금메달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파리=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