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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이 기대되는 세상은 언제…” 전문가가 말하는 ‘요즘 퇴직자들’[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4-08-10 01:40:00

[이런 인생 2막]
퇴직전략전문업체 ‘화담, 하다’ 성은숙 대표
MBA 출신 전직 경영 컨설턴트… 스타트업 설립 전 ‘퇴직자 300명 만나’
한국에서 퇴직은 어둡고 우울한 이벤트
퇴직자 85%가 인지적 불안정 겪어… 퇴직 관련 인식 바꾸는 데 일조하고파
명함 없이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 퇴직, 자기 정체성과 역할 찾는 기회로





2019년 12월 초, 지인과의 점심자리. 성은숙 씨(51)의 귀에 ‘퇴직’이란 단어가 꽂혔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하겠다며 뛰어다니던 그가 도움을 요청하려 만든 자리였는데, 지인은 앉자마자 ‘며칠전 회사에서 잘렸다’고 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두 사람은 국밥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성은숙 대표는 40대 후반에 퇴직전략 컨설팅 스타트업을 세우고 관련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처지가 비슷했죠. 이쪽은 사업 아이템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고 저쪽은 대기업 부사장이었는데 잘렸고. 여러 얘기 중 그분이 ‘퇴직자들을 위한 서비스’ 아이디어를 꺼냈는데,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지는 느낌이었어요.”

반 년 간 퇴직자 300여 명을 만났고, 이듬해 7월 퇴직전략컨설팅 업체 ‘화담, 하다’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뉴업(New-Up 業)의 발견’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본 퇴직자들의 요즘 모습은 어떨까.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의 한 공유오피스를 찾았다. 마침 이날은 법인설립 4주년 되는 날이라 했다.


퇴직 포비아로 가득찬 세상
―회사 이름이 특이하네요.

“‘모일 화(和)’에 ‘물맑을 담(淡)’,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예요. 가운데 쉼표는 말그대로 ‘인생, 한 번 쉬었다 가시라’는 의미. 초기 스타트업이다보니 중간 쉼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기대도 살짝 있었어요.”

―수많은 퇴직자들을 만나본 소감은.

“모두 퇴직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를 참 어려워했어요. 우리 사회의 퇴직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죠. 차근차근 들어보면 각자 사연이 드라마틱한데 이분들 이야기를 모아놓으니 패턴이 나오더군요.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겠더라구요. 직장인들이 퇴직 후 어떤 일이 생길지 미리 알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돼 보자….”

―어떤 패턴인가요.

“예컨대 퇴직자의 85%가 인지적 불안정 단계를 반드시 경험합니다. 하지만 많은 퇴직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을 이어갈 골든타임을 놓쳐요. 이 단계를 벗어나는 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막 5~6년까지 가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기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퇴직준비도를 스스로 측정하는 IT 기반 플랫폼으로 만들어 비즈니스모델 특허를 받았고, 각자의 특성을 분석해 적합한 퇴직 로그램을 추천하는 솔루션도 개발했다.

지난해 연말, 직원들과 업무 파트너들이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성은숙 씨 제공



“바다는 그대로였는데 내 마음이 달라졌구나”
퇴직이 비자발적이었을수록, 포지션이 높았을수록, 예측이 어려웠을수록 어려운 시기를 겪을 확률은 커진다.

“과거 퇴직 서비스라면 재정자산 중심의 관리방안을 찾아주는 게 주를 이루죠. 그런데 몇백 명을 직접 만나보니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개인의 성향과 목표, 가치관, 심리상태 등에 따라 패턴이 많이 다르더군요.”

그는 퇴직자의 상태를 골프에 빗대 러프(인지적 불안정) 단계, 페어웨이(자기 인식) 단계, 온그린(목표 구상) 단계, 홀인(목표 확정 및 실행) 단계로 나눴다.

“갑작스런 퇴직후 2년이 지난 전직 보안업체 임원이 계셨어요. 그분이 퇴직 직후 속초에 갔는데 바다가 너무 까맣고 ‘내가 뛰어내려도 아무 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런데 최근 다시 가본 속초 바다는 그저 넓고 푸르기만 하더래요. ‘바다는 그대로였는데 내 마음이 바뀌었구나’라고. 그 정도로 퇴직 당시 마음이 절망스러웠는데,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던 거죠.”

자신의 마음 상태를 2년 뒤에야 깨닫는 일은 퇴직 경험자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일단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

퇴직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살린 새로운 역할을 찾아낼 절호의 기회. 성대표는 이를 ‘뉴업’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명함이 없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균형이 필요하죠. 5가지 측면, △심리와 정서 △관계와 태도 △목표가치와 라이프스타일 △커리어 경쟁력 △뉴업의 준비도 이 5가지에 대한 균형이 어느 정도 만들어져야 퇴직 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이 사업이 비즈니스로서 성립이 되나요?

“쉽지 않았어요. 처음 3년은 뭘 해야 할지 몰라 계속 콘텐츠만 만들었어요. 뉴스레터를 만들고 인사(HR)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고. 지난해 초부터 대기업 쪽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여러 기업 프로젝트를 여러개 진행 중이예요. 경영진 150명 정도가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국 기업 차원의 퇴직자 교육같은 데서 주로 활용되겠네요.

“아무래도 기업 단위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희 솔루션 중 일부(라이트 코스)는 누구나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 들어가 진단해볼 수 있어요.”

여러 기업을 상대하면서 퇴직자에 대한 지원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낀다.

“대개 기업 구성원 40% 이상이 4050세대인데, 교육이나 동기유발 등 지원은 MZ(2030세대) 사원들에게 쏠려 있어요. 시니어들에게는 조직적인 지원이 전무하죠. 최근 일부 앞서가는 기업들이 시니어를 대상으로 어떤 지원을 할지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한 정도예요.”

―이해관계로 보자면 MZ는 오래 함께 가야할 세대이고 시니어는 곧 헤어질 사이니까요.

“그걸 MZ들이 보고 있죠. 저는 모든 사람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게 회사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나이만 따져서 임금피크가 오면 자기 직원을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회사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그분들도 10년, 20년 전에는 지금의 MZ들처럼 기대를 모았던 세대거든요. 세대 간 균형을 이뤄야 회사 전체의 동기 유발과 조직 문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퇴직자들 스스로가 준비하고 공부할 필요는 없나요?

“지금 당장 출퇴근길에 ‘이 회사를 떠나면, 혹은 명함이 없어지면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를 한번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퇴직 준비는 대단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목표로 하는 일, 내 회사에서 나의 역량이 뭔지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4월 경기도 교육청 교육연수원에서 정년퇴임을 1년 앞둔 교장 교감 선생님 100여 명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성은숙 대표. 뒤돌아 선 사진밖에 없었다고. 성은숙 씨 제공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되돌아가기
그는 퇴직 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린 새로운 역할을 스스로 찾아낼 것을 강조한다. 이를 ‘뉴업’이란 자신이 만든 단어로 설명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다듬어 퇴직 이후를 이끌어갈 역할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모두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직장인은 대체 가능한 삶을 기꺼이 살아나가죠. 자기 삶을, 시간을 월급과 바꾸는 거예요. 월급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비해 다시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살아갈 길을 만드는 게 뉴업입니다.”

―뉴업에 성공하는 요소는.

“현직에서 본인의 역량이 뭔지, 나의 콘텐츠가 뭔지 끊임없이 알아야 한다는 게 포인트예요. 저희가 만나보니 뉴업에 성공한 분들은 본인이 뭘 잘하는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신 분들. 회사 생활 외에 사회적 관계나 네트워킹이 있는 사람들이 퇴직후 뉴업에 성공합니다. 겉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본인의 역량은 계속 가져가는 분들이 많아요.”

예컨대 글로벌 기술개발자로 중동과 일본, 유럽을 누볐던 H씨는 7~8년 전 퇴직해 지방에서 맥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완전히 다른 일인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IT기술 전문가로서 굉장히 섬세한 의사결정을 하고 기술개발하던 역량이 지금 맥주를 만드는 데 너무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맥주도 온도나 환경이나 원재료가 완성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잖아요. 제작 과정에서 쓰는 역량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고 하더군요.”

유통사 임원으로 퇴직한 O씨는 하루아침에 작가가 됐다. 현직에서 퇴직 준비할 시간은 전혀 없었지만 본인의 일을 정말 열심히 잘했다. 기획서도 잘 썼고 신문이든 책이든 열심히 읽으면서 본인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는 그 역량이 작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뉴업, 본인이 뭘 잘하는지 알아야 성공

최근 발간한 ‘뉴업의 발견’

책에서 그는 뉴업의 7가지 방향성으로 △로컬가치 개발자 △인사이트 기버 △창업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게임 체인저 △가치 투자자 △자아 탐험가를 들고 있다.

보험사 퇴직후 동네 베이커리 사장이 된 사례, 회사의 전략기획자에서 많은 기업들의 전략멘토로 업을 바꾼 사례, 외국계 제약회사 총괄매니저에서 귀농도예가가 된 사례, 대기업 인사 총괄 담당자에서 청소년 인성교육자가 된 사례 등이 소개된다.

―뉴업 성공 사례들은 본인의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봤네요.

“우리 사회는 모든 걸 재무적인 관점에서, 돈벌어야 성공이라고 해왔죠. 그런데 돈이 안된다고 실패는 아니예요. 퇴직 이후에는 일거리 놀거리 생각할거리의 3가지가 균형이 잘 맞아야 해요.”

이중 통신사를 퇴직한 뒤 ‘자아탐험가’가 됐다는 J씨의 의견이 눈길을 끈다.

“한 회사 또는 한 업종에서 10년, 20년 일한 사람은 누구나 경쟁력이 있다. 시니어들을 만날 때 제일 안타까운 건 그걸 점차 잊는다는 것. 다 가지고 있고 다 해본 일인데 본인이 위축돼 그걸 모르고 지낸다. 사회나 주변 여러 문화가 그렇게 만든다. 퇴직 후 두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첫째 ‘내가 뭘 잘하지?’, 둘째 ‘내가 하는 일로 후배들이나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까?’ 여기서 시작하면 된다.”


퇴직이 기대되는 세상 만들기

화담하다가 운영하는 퇴직자들의 글쓰기 프로젝트 ‘듣는 어른’ 참가자들이 청년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성은숙 씨 제공

―앞으로 계획은.

”퇴직이 기대되는 삶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퇴직이 기대되는 이벤트가 되려면 많은 부분이 변해야 할 것같아요.”

회원 대부분이 전직 경영진이다 보니 이들을 청년들과 연결해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7학기째 여러 대학과 연계해 대학생 대상 커리어 상담이나 모의 면접, 특강 등에 나서도록 주선하고 회원들이 받은 강의료를 모아 보호종료 아동들을 위한 기부활동도 벌인다.

‘먼저 떠나는 것이 나쁜 삶이 아니며, 나중에 떠나는 것이 좋은 삶이 아니다.’

인터뷰 말미에, 성대표는 지난해 가을 78세에 타계한 선친이 남긴 말을 언급했다.

“아버지가 담담하게 남긴 이 말이 퇴직을 했거나 준비하는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회사에서도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조금 일찍 떠난다 해도 결코 나쁜 건 아니지 않나.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거니까요.”

지난해 타계한 아버지와는 유달리 각별했던 사이. 제천에서 아버지와. 성은숙 씨 제공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