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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히로시마 폭격서 日항복까지… 인류 운명 바꾼 3인

입력 | 2024-08-10 01:40:00

1945년 핵폭탄 투하 막전막후… 美-日 주요 의사결정 이끈 3인
항복 선언 하기까지 과정 담아… 역사적 결단 뒤의 인간적 고뇌
결사항전 막은 한 관료의 용기… 미공개 일기 등서 생생히 전달
◇항복의 길/에번 토머스 지음·조행복 옮김/392쪽·2만2000원·까치





1945년 8월 8일 수요일.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새벽부터 심장 발작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기어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역사를 바꾼 군사작전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손에 황량한 잿빛으로 변해버린 일본 히로시마 사진을 쥐고 있었다. 핵무기로 인해 파괴된 건물과 교량, 터미널 등의 모습이 적나라했다.

이로부터 이틀 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즉사한 사람만 7만 명에 달했다. 스팀슨은 핵폭탄이 지독하고 악마 같은 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지만 대규모 살상이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신간은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1945년 8월을 자세히 조명한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핵폭탄의 탄생 과정을 다뤘다면, 이 책은 원자폭탄이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이끌었는지에 집중한다. 독특한 건 스팀슨과 미국 태평양 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세 인물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그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주요 인물로 훗날 대량 살상을 주도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까치 제공 

저자에 따르면 스팀슨은 원폭 개발을 감독하고 투하 명령을 실질적으로 승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사후 취임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이 작성한 비망록을 건넨다.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진행된 핵폭탄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4개월 안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알려진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완성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 폭탄 하나면 도시 하나를 모두 파괴할 수 있습니다.”

미국 태평양 전략공군사령관이었던 칼 스파츠. 그는 구두 명령 대신 서면 명령을 고집하며 핵폭탄 투하 명령서를 받아 이행했다. 까치 제공 

가슴 아픈 역사지만 누아르 영화처럼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장면이 몰입감을 높인다. 원폭 투하를 위한 카운트다운이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두 번째 인물 스파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원자폭탄 투하를 “구두 명령만으로 이행할 수 없다”며 서면 명령서를 고집한다. 군인다운 그의 완고함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문서다. 결사항전을 고집하던 다른 관료들과 달리 일본의 항복을 주장한 도고의 논리는 무의미한 희생을 멈추게 했다. 세 인물의 후손들로부터 입수한 일기 등 미공개 자료가 풍부히 활용된 덕에 촘촘한 묘사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결사항전을 고집하던 일본 대신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항복을 주장한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그가 아니었다면 전쟁이 계속돼 무의미한 희생이 커졌을 수 있다. 까치 제공 

원폭 투하라는 역사적 결정 배후의 인간적 고뇌도 깊이 있게 담겼다. 윈스턴 처칠이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썼듯이 당시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전쟁이 장기화돼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리라는 점은 거의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비극적 사실이다. 물론 일본의 항복으로 잔인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맛본 한국인의 속내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원폭 투하 전후 국면을 자세히 살펴본 저자는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할 필요까지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됐다고 못 박는다. 사이판 등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많은 군인을 잃은 미국이 본토 사수에 나선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섰다면 더 큰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것. 사실 미국은 결사항전을 고수한 일본 강경파에 맞서 세 번째 원폭 투하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작을 연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보기 좋은 책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