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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3만번의 발차기… 세계 24등의 ‘금빛 반란’

입력 | 2024-08-09 21:03:00


김유진(오른쪽)이 9일 파리 올림픽 태권도 여자 57kg급 결승전에서 나히드 키야니찬데(이란)에게 옆차기 공격을 하고 있다. 키 183cm인 김유진은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긴 다리를 이용한 발차기로 많은 점수를 얻었다. 파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운동 한 번 할 때마다 발차기를 1만 번씩 한 것 같다. 매일 운동하러 갈 때마다 지옥길을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혹독하게 했다.”


9일 파리 올림픽 태권도 여자 57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유진(24)은 경기 직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랭킹 24위 김유진은 이날 결승전에서 나히드 키야니찬데(이란·2위)를 라운드 점수 2-0(5-1, 9-0)으로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이날 김유진은 ‘도장 깨기’를 하듯 체급 상위 랭커들을 차례로 물리쳤다. 16강에서 5위 하티제 일귄(튀르키예)을, 8강에선 4위 스카일러 박(캐나다)을 모두 라운드 점수 2-0으로 눌렀다. 준결승에선 세계 랭킹 1위 뤄쭝스(중국)를 2-1로 꺾었다.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팀 김유진 선수가 9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진행된 2024 파리올림픽 태권도 여자 57kg급 결승 경기 이란의 나히드 키야니찬데 선수와의 경기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기뻐하고 있다. 2024.8.9. 뉴스1

순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김유진은 자타가 인정하는 독종이다. 김유진을 지도하고 있는 손효봉 대표팀 코치는 “올림픽을 앞두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유럽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당일 오후에도 바로 훈련장으로 가더라”며 “선수가 이렇게 하니 코치가 안 따라갈 수 없지 않나. 유진이를 가르치면서 나도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고 했다.

김유진은 뤄쭝스와의 준결승 1라운드를 7-0으로 이겼지만 2라운드는 1-7로 내줬다. 이번 올림픽 경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라운드였다. 전세가 자칫 뤄쭝스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흐름이었다. 김유진은 “지금까지 훈련해 온 게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 그 힘든 훈련을 다 이겨냈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겨야겠기에 더 악착같이 발차기를 했다”고 말했다. 김유진은 3라운드 초반부터 3점짜리 머리 공격을 세 차례나 성공시키며 결국 10-3으로 승리했다.

김유진이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김유진은 세계 랭킹이 낮아 이번 올림픽에 어렵게 출전했다. 세계태권도연맹(WT)은 체급 랭킹 5위 이내 선수들에겐 올림픽 자동 출전권을 준다. 5위 이내에 들지 못하면 국내 선발전과 아시아 대륙 선발전을 따로 거쳐야 한다. 김유진은 이를 모두 거쳐 파리행 막차 티켓을 손에 쥐었다. 김유진은 “세계 랭킹은 숫자에 불과하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김유진의 세계 랭킹이 24위까지 떨어진 건 2022년 과달라하라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당한 무릎 부상의 영향이 컸다. 이후 1년가량 재활 치료에 매달리면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 길을 돌아 이번 올림픽 무대를 밟은 그는 최상의 몸 상태로 경기에 나섰다. 하루 전 남자 58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박태준(20)은 “유진이 누나가 경기하기 전에 내가 미트를 들고 맞춰줬는데 몸 상태가 정말 좋아 보였다”고 했다. 김유진 역시 “오늘 몸을 푸는데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몸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속으로 ‘일을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팀 김유진이 9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57kg급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깨물어보이고 있다. (공동취재) 2024.8.9. 뉴스1

김유진은 금메달을 딴 직후 “삼겹살에 된장찌개를 제일 먹고 싶다”고 했다. 키 183cm인 김유진은 체급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식단 관리를 철저히 해왔다. 그는 “하루에 한 끼 정도만 제대로 먹었다. 나머지는 식단에 따라 먹었다”며 “좋아하는 삼겹살을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금메달을 딴 뒤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김유진이 여덟 살 때 호신술을 배워야 한다며 태권도를 시켰다고 한다. 김유진은 “할머니, 나 드디어 금메달 땄어. 나 태권도 시켜 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올림픽 별거 아니야. 너희도 할 수 있어.”





파리=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