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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직장 찾는 퇴직자가 마주칠 뜻밖의 현실[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입력 | 2024-08-11 23:03:00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직장인이 회사를 떠난 후 맨 처음 좌절할 때는 언제일까. 아마 대부분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때가 아닐까 싶다. 신문에서만 읽던 기사가 내 얘기가 되는 순간, 한꺼번에 몰려오는 당혹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얼마 전 중장년을 위한 일자리 박람회에 다녀왔다. 일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중장년만을 위한 행사라니 출발 전부터 기대가 컸다. 내게 꼭 맞는 자리를 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찾아갔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박람회장에서 본 중장년 일자리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본 퇴직자라면 누구나 알게 되어도 쉽사리 꺼내지 않는 이야기, 미리 알았더라면 나의 퇴직 준비도 달라졌을 것 같다.

첫째, 퇴직자의 스펙은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자격증을 따서 또 다른 도전을 해볼까,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해 강의를 해볼까, 끝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회사 밖에 나와 보니 자격증과 학위를 활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 역시 남들과 비교하여 부족하지 않을 만큼 퇴직 준비를 했지만, 그 덕을 보지는 못했다. 대학원을 포함해 스무 곳 가까운 기관에서 받은 교육과 열 가지 넘는 자격증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불안한 마음만 달래주었을 뿐이다.

실제로 박람회장에서 인터뷰하는 중에 학위나 민간자격증 취득 여부를 질문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퇴직 준비들이 사실상 일자리를 구하는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짬짬이 어필하려고 해도 애당초 말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돌봄이나 건물관리 등에서 일부 자격증을 원하는 기업이 있었지만 평범한 퇴직자와 직장인들이 수월하게 접근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둘째, 퇴직한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대다수 퇴직자가 특정 분야만큼은 스스로를 최고의 전문가라고 여긴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갈고닦은 실력은 웬만해선 뒤지지 않을 거로 확신한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퇴직자에게 그런 역량을 바라지 않았다. 퇴직 후 재취업 면접에 숱하게 응시했을 당시에도 대부분의 기업들은 내가 가진 업무적 능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전문가를 과연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중장년 취업에 퇴직한 전문가는 필요 없었다.

일자리 박람회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그곳에서 상담하는 사이에 내 강점을 묻는 회사는 없었다. 대표적인 곳이 보험회사였다. 안내를 전담하는 직원은 정년 없이 고소득이 가능하다며 열심히 나에게 해볼 것을 권했다. 소개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입사 절차가 까다로울 법한데 상담사는 별다른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그 직종에서 일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지방권 영업에 사용할 차량과 운전면허 그리고 관련 지식이 전부였다.

셋째, 퇴직자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았다. 직장인 시절에 나이는 경력을 드러내는 나이테와 같았다. 연차가 쌓일수록 실력이 늘어났고 보상도 커졌다. 그렇지만 회사 밖에서는 나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퇴직자의 나이는 무조건 적을수록 좋았다. 투박한 태도는 가다듬고 모자란 자질은 개발하면 된다지만 이미 들어버린 나이는 어찌하랴. 나이야말로 퇴직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애물이었다.

상담을 받아보았던 박람회 참여 기업들도 가장 먼저 내 나이부터 물었다. 답변하면 그제서야 세부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가까스로 기준을 통과했지만 듣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내가 설 곳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아 착잡한 심경이었다. 어느 부스에서는 내 뒤로 순번을 기다리던 머리 희끗한 사람이 나이 얘기가 나오자 슬그머니 돌아 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나이에서 지원 요건이 안 된다는 걸 알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던 것 같다. 이처럼 퇴직자의 의지는 나이 앞에서 무력했다.

한마디로 동상이몽이었다. 퇴직자와 퇴직자를 채용하는 기업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이를 증명하듯 그동안 만났던 퇴직자들은 하나같이 얘기했다. 본인이 한때 대단한 업적을 올렸고 경험과 학식이 뛰어나다고 말이다. 반대로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기업들은 입장이 달랐다. 기업들은 구직자가 지난날 얼마나 화려한 이력이 있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기업 임원이든 고위 공무원이든 당장 택시를 몰 수 있는지, 어르신 케어를 할 수 있는지만을 확인하려 했다. 이런 서로 다른 시각차가 퇴직자들의 구직 현주소였다.

그럼에도 퇴직 후 신속하게 두 번째 직업을 찾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시 이러한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시작해보면 어떨까. 찬란했던 영광에 취해 사는 퇴직자에게 인생 2막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시점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퇴직자를 응원드린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