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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발 승부의 순간, 수만 시간 훈련한 나를 믿으면 이긴다”[월요 초대석]

입력 | 2024-08-11 23:15:00

파리 올림픽 국가대표 마음 돌본 한덕현 중앙대병원 교수…상위 0.1% 국가대표의 공통점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새로운 도전을 능동적으로 수용
사격 슛오프 접전 0.1점 차 메달… 탁구 내리 3세트 뺏기고도 승리
모든 상황 대비해 계획과 훈련 반복… 그 훈련 해낸 나를 믿으면 이긴다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친 파리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리 코칭을 맡은 한덕현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6일 중앙대 의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테니스 선수를 꿈꿨다는 그는 “의사가 되어 운동 선수를 만나 보니 함부로 도전하지 않길 잘했다 싶더라”며 웃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24년 파리 올림픽을 100일 앞둔 5월부터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으로 매주 출근했다. 사격, 배드민턴, 수영, 유도, 펜싱 사브르 대표팀 지도자와 선수를 대상으로 ‘팀 분석’을 하고 훈련과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 코칭을 했다. 하나같이 파리 올림픽 초반 메달을 휩쓸며 우수한 성적을 냈던 종목들이다.

고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 선수를 꿈꿨던 한 교수는 프로 운동선수를 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 싶어 진로를 바꿔 의대에 진학했다. 직접 선수로 뛰는 대신 전공의 시절부터 우리나라에선 불모지였던 스포츠 정신의학을 개척해 왔다. 6일 중앙대 의대 연구실서 만난 그는 “국가대표 선수들은 건강한 마인드의 모범과도 같았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에서 ‘스포츠 팀 분석’이 처음 도입됐다.

“이번 올림픽 목표가 금메달 5개일 정도로 선수들은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자며 대한체육회 훈련본부와 의무본부가 심리 코칭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우선 파리 올림픽을 위한 심리검사 도구를 따로 만들었다. 개인마다 인지 능력, 성격 등을 먼저 검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감독, 코칭 스태프, 선수들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한 요령을 알려줬다. A 종목을 예로 들자면, 선수들은 상당히 외향적인데 코치들은 내향적이었다. 코치들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오히려 선수들이 편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는 B 선수에겐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면 지루하니 훈련법을 바꿔보라고 했다. 팀을 모아두고 속된 말로 ‘툭 까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팀워크가 저절로 좋아졌다.”

‘팀 분석’의 성과를 물으니 “내담자와의 상담 내용은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았다. 메달 2개를 수확한 남자 펜싱 사브르팀은 “서로 믿어주고 끌어주는 신구 조화가 훌륭했다”고, 깜짝 반전을 일군 사격팀은 “경쟁을 시키기보다 ‘원팀’을 만들려는 감독의 리더십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인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가.


“국가대표는 운동선수 중에서도 0.1%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인도 성공한 0.1%의 마인드는 다르지 않겠나. 20세, 30세 어린 선수들인데도 대단하다고 느낀다. 첫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의 장단점이 무엇이고, 실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고, 심지어 ‘이번 대회에선 은메달을 딸 것 같다’ 정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둘째,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동안 성과를 발휘한 훈련법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르기 마련인데 새로운 훈련법, 새로운 지식에 열려 있다. 셋째,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어떤 훈련을 했을 때 적중률이 올라가고, 메달 색깔이 바뀌는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 입력값에 따른 결괏값이 일정해지므로 훈련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사격 반효진 선수는 슛오프 접전 끝에 0.1점 차로, 김우진 선수 역시 슛오프 동점에서 4.9mm 차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단 한 발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 그 긴장감을 어떻게 견디는 건가.

“선수들에게 훈련한 만큼, 실력만큼만 하고 오자고 이야기한다. 불안을 숨기거나, 자신을 속이면 밖으로 불안이 뛰쳐나온다. 실력이 8이면 8만 하고 오자, 3이면 3만 하고 오자고 한다. ‘더 잘해라’ ‘더 열심히 해라’ 하지 않는다. ‘그대로만 하고 오자’고 한다. 아, 양궁은 다르다. 양궁은 30발 쏘면 30발 전부 10점인 선수만 뽑아 가니까.”

―경기에 뛰는 선수라면 누구나 잘하려고 하지 않나.


“잘하려고 하면 나를 잃어버리고, 그러면 진다. 배드민턴을 칠 때 짧게 치려고 손목을 빨리 꺾는다. 잘하려고 하면 평소보다 더 빨리 꺾게 되고 네트에 걸린다. 다음에는 더 늦게 꺾어 보는데 그럼 아웃이 된다. 평소 익힌 감을 믿어야 한다. 매일 땀 흘려 훈련하는 이유다.”

―아무리 평소 훈련한 대로 경기에 임한다 해도 지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건 경이롭다. 탁구 신유빈 선수가 내리 3세트를 졌을 때나, 유도 안바울 선수의 투혼을 보면 보는 사람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 순간 나를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이다. 평소 역전당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맞춰 훈련한다. 열심히 훈련한 나를 믿어야 한다. 사격할 때 총을 쏘는 리듬이 있다. 평소 ‘탕탕탕’ 쏘는데 ‘탕탕탕탕’ 쏘고 있다면 긴장해서 리듬을 잃은 거다. ‘리듬이 달라지는 상황에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리듬을 찾는다’ 이런 연습을 하고 출전하는 거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라고 적은 반 선수의 쪽지가 화제가 됐고, 펜싱 도경동 선수는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태권도 김유진 선수는 “이거 하나 못하겠어”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수행 능력을 점화시키는 큐(cue·신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펜싱 박상영 선수가 상대 선수를 공격하기 전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민첩하게 칼을 찌를 수 있는 수행 능력을 불러오는 큐 단어인 거다. 선수마다 각자의 큐 단어가 있다.”

―힘든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최고가 되고 싶은 동기는 어디서 나오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그걸 연구한 적이 있다.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를 열망한 이유를 물었더니 ‘먹고살기 위해서’를 첫손에 꼽았다. 그다음으로 ‘명예를 드날리는 게 좋아서’ ‘내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순이었다. 놀런 라이언의 공을 쳤다,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는 만족감을 좇는 거다. 세 가지 이유가 섞여서 강력한 동기가 된다.”

―보통 직장인들도 같은 이유로 회사에 다니지 않나.

“안세영 선수와 비슷한 배드민턴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안 선수의 동기 부여가 더 강력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서도 감탄할 만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가 있었나.


“국가대표 선수들은 거의 그렇다. 탁구 현정화 감독이나 농구 하은주 선수는 그동안 만난 어느 의사나 교수보다 똑똑했다.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미래의 계획이 뚜렷했다. 실제 은퇴 이후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만난 쇼트트랙 김아랑 선수도 기억에 남는다. 첫 상담에서 금메달을 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케이트 왜 탔어요’ ‘앞으로 목표가 뭐예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치를 두는 건 뭐예요’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19세 소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술술 답했다. 일주일 뒤, 한 달 뒤, 일 년 뒤 목표를 세워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왔다고 했다. 미래와 연결될 때만이 지금 이 순간 힘든 훈련이 가치를 갖는다. 정신과 의사가 해 줄 조언이 없었다.”

―줄곧 계획을 강조하는데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했더니 메달을 땄다’는 선수도 있었다.


“참 겸손한 말이다. 선수들 마음속에는 365일 전부 계획이 있고 그중 하루를 열심히 살고 ‘×’ 표를 한 거다. 성공한 선수들은 다 계획이 있다.”

―선수들의 발랄하고 기발한 메달 세리머니에 즐거웠다.


“준비하고 나온 것일 텐데….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정말 건강해 보이지 않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누군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미야’는 기억할 것이다.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 국민이 알아보고 열광했다.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가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을 갖고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건 의사로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메달을 딴 순간에만 주목하지만, 선수들은 ‘포스트 올림픽 증후군’을 겪는다고 한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무감이 크다. 선수 인생 전체로 보면 올림픽은 한 계단이다. 인생 목표가 계단 10개라고 치자. 금메달을 따서 3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못 따서 1계단만 올라갔다. 다음에 2계단 더 올라가면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다. 양궁 김우진 선수가 ‘메달 땄다고 젖어 있지 마라’, 사격 김예지 선수가 ‘0점 쐈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인생을 이런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한덕현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54)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보스턴대 연구 전임의로 각각 뇌과학과 스포츠 심리를 연구했다. 현대유니콘스, FC서울, KT 위즈, LG 트윈스 등 프로야구단에서 스포츠심리 닥터를 지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시작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리 코칭을 담당했다. 미국 정신의학회 젊은 연구자상, 한미자랑스러운의사상, 유한의학상 등을 수상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