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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문병기]AI 등 파괴적 신기술 정책 지원 더 과감해야

입력 | 2024-08-11 23:12:00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한국의 도전 과제는 두 가지다. 혁신 분야에서 세계적인 리더가 되는 것,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한국처럼 고소득 국가로 올라서도록 돕는 것이다.”

인데르미트 길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5일(현지 시간) 본보 등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길 부총재는 중진국들이 선진국에 이르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저소득국가로 후퇴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중진국의 함정(Middle income trap)’이란 용어를 처음 제시한 경제성장 이론의 저명한 경제학자다.

‘2024년 세계 개발 보고서’에서 한국을 ‘경제성장의 슈퍼스타(superstar)’라고 평가한 길 부총재는 한국 경제의 최대 과제로 저출산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확산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도 아닌 혁신을 꼽았다.


보호주의 넘을 정교한 정책 필요해


한국이 특별히 인공지능(AI)이나 양자 컴퓨터 등 핵심 신흥기술 투자에 뒤처져서는 아니다. 그는 “한국이 AI와 머신러닝 등 새로운 기술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한국은 매우 좋은 기술과 혁신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가 혁신을 한국의 최대 과제로 꼽은 이유는 정책 결정력과 규제 때문이다. 그는 “한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대기업에 유리했던 규제를 개혁해 균형을 맞추고 정보기술(IT) 혁신을 이뤄냈다”며 “하지만 혁신은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제 경제환경이 어려워지고 개방의 힘이 약해질 때 정책 결정은 더 복잡해지고 규제는 더 정교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등 산업지형을 뒤흔드는 파괴적 신흥기술의 등장, 미중 전략경쟁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보호주의의 파고 속에 한국이 경제성장의 신화를 이어가려면 민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와 행정 등 공공부문의 경쟁력 혁신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에선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전쟁 속 한국의 지원 정책에 대해 인색한 평가가 잇따랐다. 미국 싱크탱크 피터슨연구소는 6월 미국 반도체법 이후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주요국 정책을 비교한 보고서에서 “미국 반도체법은 막대한 보조금으로 많은 투자를 유치해 완전한 반도체 가치 사슬을 확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며 “반면 한국의 반도체 투자는 주로 한국 기업에 국한돼 있다”고 지적했다. 찰스 목 스탠퍼드대 사이버정책센터 연구원은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 “일본이 산업정책을 통해 국내 생산능력 강화에 주력한 것에 비해 한국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미흡했다”며 “한국은 대중국 의존도 문제 역시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속에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권-정당 초월한 기술 지원 미국 배워야


일부 기술에서 중국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지만, 미국의 신흥기술 지원 체계는 참고할 만하다. 미국은 미래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AI와 양자 컴퓨터 기술은 백악관에 컨트롤타워 격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정부 부처의 규제와 재정 지원, 공공 및 대학연구소의 기술 연구, 민관 컨소시엄을 통한 상용화 기술 개발을 조율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과학기술정책을 전담해 온 전문가들이 이끌고 있다. 무엇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조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면서도 AI와 양자 컴퓨터에 대한 관심과 지원 정책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부가 최근 국가AI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은 늦었지만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세액공제 확대를 주요 내용으로 담은 ‘K칩스법’ 등이 아직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길 부총재는 “미국 민간 부문은 규제와 공공정책 덕분에 매우 회복력이 강하다”며 “이는 한국에도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흘려듣지 말아야 할 조언이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