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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흥망 묵묵히 지켜본 회화나무에 쌓인 200년 이야기

입력 | 2024-08-12 03:00:00

옛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서… 이명호 작가 ‘회화나무’ 특별전
“나무의 복잡한 심정 느껴보길”
선원전 터서 나온 기와도 전시… 국가유산청, 궁궐로 복원할 예정




9일 오후 덕수궁 선원전 터의 옛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에서 열린 특별전 ‘회화나무, 덕수궁…’에서 이명호 사진작가가 본인의 작품 옆에 서 있다. 전시의 모티브가 된 회화나무는 조선 임금의 어진이 봉안된 선원전이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고 사택이 들어서는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흰 캔버스를 배경으로 한 그루의 나무가 찍힌 사진이 텅빈 방에 걸려 있다. 왼쪽으로 기운 거대한 녹빛 나무는 웅장하면서도 어딘가 고단해 보인다. 사진 속 나무는 덕수궁 선원전 인근에 우뚝 선 회화나무. 전문가들에 따르면 수령(樹齡)이 최소 2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가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다사다난한 역사를 묵묵히 바라봤다는 이야기다. 궁궐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나무의 심정은 어땠을까.

9일 서울 덕수궁 선원전 터의 옛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에서 열린 이명호 사진작가의 특별전 ‘회화나무, 덕수궁…’을 찾았다. 국가유산청이 8월 한 달 동안 사택을 특별 개방하면서 열린 전시다. 일반에 사택 내부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서양과 일본식 건축 양식이 섞인 사택의 외부 모습. 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서양과 일본식 건축 양식이 섞인 목조 주택 곳곳을 천천히 훑어봤다. 서양식 벽난로와 다다미 형태의 방이 독특한 느낌을 줬다. 별다른 장식과 가구가 없는 방에는 회화나무를 다양한 각도와 계절에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회화나무를 위에서 촬영해 동그랗게 표현하거나 겨울에 촬영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게 인상적이었다.

이 작가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회화나무의 복잡한 심정을 생각하면서 기획했다”라며 “관객들이 수백 년간 역사의 현장을 지킨 나무의 이야기를 듣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택 초입에는 선원전 터 발굴 조사 중 나온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었다. 용무늬와 봉황무늬가 정교하게 장식된 기와가 이곳의 오래된 역사를 짐작하게 했다.

‘아름다운 옥의 근원’이라는 뜻의 선원전은 역대 조선 임금들의 어진과 신주를 봉안한 공간이다. 본래 선원전은 궁궐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겨졌다. 덕수궁 선원전은 고종이 망명 갔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만들어졌다. 본래 동쪽 포덕문 인근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1900년 화재로 소실된 뒤 190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선원전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직후 일제에 의해 훼철됐다. 궁궐의 심장부가 일제에 의해 조각조각 팔려나갔다. 정동 39번지는 일제 금융기관에 팔려 1938년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들어섰다.

광복 후에도 선원전은 수난을 겪었다. 미국 정부가 이 터를 사들여 미국대사관 건물을 신축하려 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이 부지가 선원전 터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문화재 지표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선원전 터가 발굴됐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공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축 계획이 무산됐다. 결국 우리 정부는 2011년 미 정부로부터 토지 교환 방식으로 선원전과 흥덕전, 흥복전 터 일대(8000㎡)를 돌려받았다.

국가유산청은 2039년까지 진행될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 계획’에 따라 이 일대를 궁궐로 복원할 예정이다. 조선저축은행 사택이 포함된 부지 일대는 2030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는데, 그 이전까지 사택을 철거하지 않고 민간에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공간인만큼 빨리 철거해 지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 복원정비과 최자형 사무관은 “공사 전까지 사택은 선원전 복원 과정과 부지에 얽힌 역사를 알리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며 “우선 올해는 이달 31일까지만 시범 개방한 뒤 내년부터 정식으로 문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