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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소설이라 되레 자기검열 없이 마음 가는대로 썼죠”

입력 | 2024-08-12 03:00:00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데뷔작 한국어로 출간
“아버지도 읽을 수 있게 돼 기뻐”
美 출판사서 2억원 선인세 대박



영문으로 쓰인 첫 장편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으로 해외에서 먼저 반향을 일으킨 이미리내 작가.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드디어 아버지가 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뻐요.”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전후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헤쳐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첫 장편소설을 영국, 이탈리아 등 10여 개국에서 출간하며 주목받은 신인 작가 이미리내(41)를 7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영문으로 쓰인 데뷔작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위즈덤하우스)은 미국에서 억대 선인세를 받으며 계약되는 등 해외에서 먼저 반향을 일으켰고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그는 “아무런 배경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책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라서 더 떨린다”고 말했다.

2021년 하퍼콜린스가 이 작가의 데뷔 소설을 2억 원에 사들인 것은 출판계 큰 이슈였다. 하퍼콜린스는 ‘앵무새 죽이기’, ‘모비딕’ 등 영미문학 고전을 다수 낸 출판사다. 아시아계 등 외국인 작가의 작품을 주로 내는 하위 브랜드가 아니라 본사 브랜드로 출간됐다.

이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한국에서 마쳤다. 미국 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가족과 홍콩에서 13년째 거주 중이다. 한국어로도 소설을 써 봤지만 잘 안 됐단다. 이 씨는 “영어가 공용어인 곳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로 소설을 쓰게 됐다”며 “모국어가 아니어서 오히려 자기 검열 없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었다”고 했다. 경기 파주에서 대인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친할아버지, 탈북자였던 이모할머니 등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자란 토종 한국인이 영어로 쓴 소설의 장점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동서양의 정서를 넘나들며 자유자재의 문장을 구사한다. 민들레 홀씨를 ‘묽게 쑨 흰쌀죽을 토해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지뢰가 터지는 순간은 ‘네온빛 페이즐리 문양이 시야를 채웠다’고 썼다. 이 작가는 “어느 카테고리에도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작가들이 많이 나오는 게 (다양성 면에서) 좋은 신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판문점’, ‘비무장지대’ 등 외국인에게 낯선 지명과 용어가 많지만 한국 문학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아져 출간에 장벽이 되지 않았다. 이 씨는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서양 에디터들도 이전에 맡은 한국 작품이 인기를 끌어서인지 한국 작가들에게 열려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영국에서는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 출간을 담당했던 에디터가 이 씨의 책을 맡았다.

최근 미국 유명 에이전시와 영상화 가능성도 검토 중인 그는 “책을 쓰던 중 ‘한공주’를 봤다”며 “아직은 혼자만의 상상이지만 주인공 역할에 천우희 배우가 어울릴 것 같다”며 웃었다. 발표와 동시에 지명도를 얻게 된 이 작품은 마흔을 넘긴 그의 데뷔작이자 첫 장편이다. 그는 “아주 천천히, 조용히 발전하는 예술가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