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조네스서 시작된 여전사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 기록들에 널리 등장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암포라 전차를 몰고 가는 여전사.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제공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마존’이라는 단어를 ‘가슴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한 데에서 기인한 것일 뿐 전혀 근거가 없다. 가슴을 살짝 동여매는 정도로도 충분한데 굳이 잘라낼 리는 없다. 이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기마인들에 대한 공포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의 남자 전사들을 심지어 고자라는 뜻의 ‘에나레스’라 부르기도 했다. 저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라버리고 괴물이 되었다는 식의 서사다. 최근 히어로 무비에서 피폭이나 실험으로 돌연변이가 되어서 힘이 센 괴물이 되었다는 클리셰를 연상하면 된다.
20세기 들어서 흑해 연안 일대 스키타이 기마민족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실제로 제법 많은 여성 전사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어떤 고고학자의 연구 결과 흑해 연안에서만 1990년대까지 약 120개의 여성 전사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무덤 평균 3개 중 1개꼴로 남자들이 사용할 법한 무기와 갑옷이 부장된 경우도 있었다. 여성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무장한 전사였다는 뜻이다.
여성 전사는 시베리아 일대에서도 속속 발견되었다. 그 배경에는 최신 DNA 연구가 있다. 과거 외형만을 보고 남자로 분류했던 인골들이 여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1988년에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에서 발굴된 2600년 전 전사도 12∼13세 정도의 여성으로 재판명되었다. 이 여전사의 무덤에는 1m가 넘는 활과 70cm의 도끼 등 완전한 군장이 갖춰져 있었다.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전혀 없는 거의 완벽한 ‘남성’의 무덤이었으니 고고학자들이 오해할 만했다.
당시 유목민들은 10대부터 전사로 활약했고, 상당수는 20세 전후 전사해서 묻혔다. 10대 중반에 죽는다면 2차 성징이 뚜렷하지 않아서 인골만으로 남녀를 구분하기 어렵다. DNA로 성별의 판독이 가능해지면서 실제 여전사들의 비율이 높았음이 밝혀진 것이다. 흑해 일대뿐 아니라 중국 북방 만리장성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전사의 역할을 수행했음이 밝혀졌다.
DNA로 밝혀진 여성전사의 존재
파리 올림픽 양궁, 사격, 펜싱 종목에서 여성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총, 칼, 활을 든 여성 전사들은 세계전쟁사에 무수한 활약 기록을 남겼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은 여성 스나이퍼 부대를 양성해 큰 성과를 거뒀다. 17세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니나 알렉세예브나 로콥스카야.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살아남은 초원의 여전사는 결혼하고 육아에 힘쓰면서 또 다른 전사를 길러냈다. 당시 유목민들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출전할 때는 모든 전사가 동원되고 본거지에는 아내와 노약자들이 남아 목축동물을 지켰다. 이런 상황을 역이용해서 본거지를 급습하고 목축동물을 약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용맹한 전사 출신의 엄마들은 마치 예비군처럼 칼을 들고 무장했다. 자기 자식과 가족들에게 칼과 화살을 겨누는 적들을 향한 엄마 전사들의 처절함과 용맹함은 상상 초월이었을 것이다. 이런 ‘엄마부대’로 구성된 유목민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조네스라는 전설에 일조했을 것이다.
여진족에도 10대 초반 여전사들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를 죽인 사카족의 여왕 토미리스에 관한 영화 ‘토미리스’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영화 ‘토미리스’ 화면 캡처
여장부는 고대 중국에도 있었다. 문화혁명이 끝나가던 1976년에 발굴된 상나라 무정(武丁)의 부인인 부호(婦好) 묘에서는 16명의 순장 인골과 청동기 460여 점이 발굴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비의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전쟁에서 실제로 앞장서는 장군 역할을 했다. 상나라 시절 왕은 샤먼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며 밤에 술을 마시고 제사를 지내며 측근인 정인(貞人)들과 점을 치며 정사를 했었다. 반면에 부호는 최대 1만3000명의 군인을 인솔하던 장군이었다. 부호의 무덤에서 수백 점의 복골이 발견되었으니, 낮에는 전쟁에 앞장서고 밤에는 점을 치고 제사를 지내며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도 한 셈이다.
베이징 근처에서도 3000년 전 전차를 직접 몬 여장군의 무덤이 발굴됐다. 여성들은 주로 점을 치는 사제의 역할을 했다고만 알려졌는데, 실제 장군의 역할도 했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소련군 여성 스나이퍼 부대 양성
흑해 연안 스키타이 기마민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두개골이 비대해진 흔적이 많았다. 이것은 호르몬 이상인 모르가니-스튜어트-모렐 증후군의 결과인데, 여성이라면 남성적인 특성이 강하게 발현된다. 기마민족들은 이런 여성들을 군사력으로 적극 이용한 것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평생을 여성으로 살았지만 근육이나 골격이 남성과 같은 복싱 선수 이마네 칼리프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진족에도 10대 초반 소녀들로 구성된 여전사가 있었다. 이들을 다룬 넷플릭스 영화 ‘킹덤: 아신전’. 사진 출처 넷플릭스 CJ ENM 제공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여성 전사나 여인국에 대한 믿기 어려운 흥미 위주 풍문이 넘쳐난다. 이런 문화에 익숙지 않은 정착민들이 여성 전사의 존재에 여성에 대한 신비로운 환상을 덧입혀 이야기를 부풀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동해 한가운데에도 고대 여성들의 나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이다.
‘여성 전사’에 대한 환상엔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남성중심사회의 선입견도 영향을 미쳤다. 중세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처녀 잔다르크가 화형당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남자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들이 돌을 날랐다는 이야기나 2차대전 때 독일군을 사살한 소련의 여성 스나이퍼 무용담까지 그들의 용맹함은 결국 가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위험에 처한 가족과 조국을 앞에 두고 어찌 남녀의 구분이 있을까. 아마조네스에서 시작된 ‘여성 전사’의 신화는 어쩌면 우리의 무지와 편견이 만든 이야기일지 모른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