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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칼럼]트럼프 장기판 위의 대만, 그리고 한국

입력 | 2024-08-12 23:21:00

박빙 승부로 되돌아간 美 대선 드라마
‘찐 현실주의’ 트럼프 2기 가능성 여전
‘가치외교 종언-불가측 시대’ 대비 없이
이념 앞세운 ‘우리편 외교’만 할 때인가



이철희 논설위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자못 흥미로워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총기 피격 사건 이후 승기를 굳힌 듯하더니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전격 사퇴하자 그 바통을 넘겨받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예상밖의 선전을 보여주면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하다. 이제 선거전은 ‘이상한 트럼프’ 대 ‘미친 해리스’의 박빙 대결로 바뀌었고, 석 달도 남지 않은 투표까지 또 어떤 충격과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질지 예측불허의 상황이 됐다.

모든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 결과 예측이 아니라 그 이후의 대비임을 새삼 확인케 한다. 외교정책 경험이 부족한 해리스로의 후보 교체는 향후 미국 대외정책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해리스가 당선될 경우 그 노선은 ‘바이든 2.0’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만큼 향후 대외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부를 ‘트럼프 2.0’의 파괴력에 여전히 주목해야 한다.

최근 대만이 겪은 충격파는 트럼프 2기가 국제사회에 몰고 올 혼란의 예고편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는 피격 며칠 뒤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항해 대만을 방어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만은 우리 반도체 사업을 전부 가져갔다. 대만은 방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우린 보험회사와 다를 게 없는데, 대만은 전혀 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만은 미국과 9500마일 떨어져 있는데, 중국에선 68마일이다”라며 방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도 했다.

예전에도 트럼프는 같은 질문에 “내 카드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즉답을 피하면서도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곤 했지만 그의 백악관 복귀가 굳어져가던 시기여서 발언의 무게는 남달랐다. 대만의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기업 TSMC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대만 행정원장이 나서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대만에선 TSMC에 대한 ‘애국 투자’ 열기가 일었고, 라이칭더 정부는 내년도 방위예산을 역대 최대로 편성하는 등 트럼프 리스크 대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은 오랜 기간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사적 개입 여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견지해 왔고, 트럼프는 그런 노선에 충실한 답변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작 신냉전 대결 속에 이런 ‘전략적 모호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바이든이었다. 그는 재임 중 네 차례나 대만을 방어하겠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렇다”고 즉답했다. 물론 그 뒤엔 늘 백악관 측이 부랴부랴 “우리 정책에 변화는 없다”며 사실상의 실언이라는 식으로 진화하곤 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트럼프의 시각은 유별나다. 전통적 외교 문법에선 지극히 이단적이다. 유럽 학계는 미국 공화당의 정책 분파를 △세계 패권을 유지하자는 미국우월론(primacists) △세계의 경찰이 아닌 국내 문제에 집중하자는 개입자제론(restrainers) △유럽·중동이 아닌 중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우선순위론(prioritisers)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세 그룹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두에 다리를 걸친 채 필요에 따라 집어들 뿐이다.

사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자유주의의 망토를 걸친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어떤 레토릭으로도 포장하지 않는 ‘찐 현실주의자’다. 1기 때부터 미국의 패권적 위상을 내세우면서도 군사적 개입엔 몸을 사렸다. 동맹과 우방을 깔보며 독재자들과 어울렸다. 그에겐 어떤 이념도 가치도 없다. 매사를 거래 관계로 보고 경제적 손익계산 아래 그때그때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트럼프 2기의 위험성도 바로 거기에 있다.

트럼프가 몰고 올 혼란은 대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 반도체 사업을 가져간 부자 나라, 왜 그런 나라를 방어해줘야 하느냐는 주장은 당장 한국에도 그대로 겹쳐진다. 주한미군 철수 압박과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는 불 보듯 뻔하고, 북한과의 직거래 신호는 한반도 정세의 불가측성을 한껏 끌어올릴 것이다. 이제 김정은마저 “대화도 대결도 우리의 선택으로 될 수 있다”며 3년여 만에 직접 ‘대화’를 언급하고 나섰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선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레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지만 이렇게 느긋할 일인지 걱정될 정도다. 트럼프 복귀는 예측 가능한 외교의 시대에 종언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는 그간 가치와 이념을 앞세운 ‘우리 편’ 외교에만 주력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모레 광복절 기념사에서도 자유·인권을 강조하는 새 통일담론을 제시한다는데, 과연 그 선명한 이념적 언어 안에 냉철한 현실인식과 실천전략은 얼마나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