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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소소칼럼]

입력 | 2024-08-13 13:58:00


여름방학이면 방바닥에 철썩 눌어붙어 시간을 보내는 수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손님도 없는 집에 에어컨을 튼다는 건 당시의 엄마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더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결국엔 방바닥 부침개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 당신은 부지런히 쌓이는 방학의 밥그릇이나 여름 빨래들과 씨름하느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으면서 나한테는 고생도 덥지도 말라고 그랬었다.

그때 엄마는 알뜰한 가정주부가 되기 위해 티슈 한 장도 조각내 세 번에 걸쳐 쓰기(모기 잡았다고 티슈 한장을 통째로 뽑는 날엔 바로 등짝 스매시), 집안의 온갖 전기 코드 뽑고 다니기(설령 하루에 10번도 넘게 쓰는 전자레인지라 할지라도), 퇴근한 남편 들어오기 전까진 거실 불 안 켜기(자녀 공부 시엔 예외) 등을 실천했는데, 이는 당시 그녀가 선보였던 기행 중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들이다.

여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내 부모는 아마도 세상살이가 좀 무서웠던 것 같다. 둘 다 지방의 대단치 못한 집안에서 막내아들, 막내딸로 자라 별다른 도움 없이 덜렁 시작한 결혼생활이었다. 상경해 아이 둘 달고 10년 만에 내 집 장만이면 좀 누릴 만도 한데 몇 년 안 살고 그 집을 던져버렸다. 지금 살만한 작은 집 말고, 나이 들어서도 자식들 도움 없이 영영 살다가 죽으면 되는 집을 40대의 내 젊은 부모는 원했다.

외벌이 가장이었던 아빠의 어깨에 도대체 자식들 인생 어디까지가 걸쳐져 있었던 것일지 아득하다. 25평짜리 깨끗한 집을 적당한 가격에 팔고, 다 쓰러져가는 22평 주공아파트를 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샀다. ‘재개발이 되네, 안 되네’ 연기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건 베팅이었다. 아빠가 손이 떨려 못 찍고 있는 도장을 엄마가 호통을 쳐 겨우 찍었더라는, 계약일과 잔금일 사이 재개발이 결정돼 집주인이 계약을 무르려 별의별 짓을 다 하다 중개인의 역정에 겨우 나타났더라는 얘기는 이제 와서 나누는 우리 가족끼리의 술자리 안줏거리다.

이것이 당시 행해졌던 그녀의 다채로운 기행의 연유다. 무리해 들어간 집이라 좀 아낄 필요가 있었다. 독자들의 비위를 생각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한때 유행했던 문구인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내 식대로 바꿔보자면 “난 크면 오줌 한번 쌀 때 물 두 번, 세 번씩 내리면서 살 거야!”다. 그 모든 노력을 합쳐도 어차피 한 달에 만 원도 못 아낀다. 그러나 이 구질구질함이 나의 똑똑하되 수줍었던 아버지로 하여금 외로운 돈벌이를 버티게 했다.

어찌저찌 계약에 성공하긴 했지만, 우리도 나름대로 급하게 구한 집이라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층인 데다 모서리 집이어서 여름이면 이마에 땀 맺히는 속도 따라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송골송골 피었다. 겨울엔 믿을 수 없도록 추웠다.

물론 알뜰살벌한 그녀는 빵빵한 보일러 대신 폭신한 극세사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줄 뿐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극세사 이불을 죽도록 싫어하고 겨울에도 방이 차야 잠을 잘 잔다. 아무리 싫어도 부모는 자식에게 무언갈 심는다.

나는 그 공간이 집이 아니라 땅처럼 느껴졌었다. 곰팡이나 벌레 추위 더위 이런 것들이 아마 분명 싫었을 텐데 그런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어떤 계절, 시간이 곧 당도할 예정임을 늘 미리 알려줬었던 그 땅의 깊은 냄새가 가끔씩 그리울 뿐이다. 그 집에선 봄을, 비를, 새벽을, 방학을 냄새로 먼저 알았다. 거의 대부분의 생을 시간에 쫓기며 지냈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시간을 기다리며 살았다.

단지 곳곳엔 플라타너스와 단풍나무 길이 펼쳐져 있었다. 큰 나무는 다 뽑아버린 지금의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키의 나무들이었다. 가을이면 늘 단풍 명소로 꼽히곤 했던 그 아름다운 숲길이 내 통학길이었다.

그 길엔 비가 내릴 땐 비가 안 오고 비가 그치면 비로소 잎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늦게 당도하는 터널이었다. 머리에 뭐가 톡 하고 떨어져 빗물이겠거니 하고 집에 가서 보면 송충이였다. 한여름에도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구간, 겨울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온도가 낮았던 그 숲길에서 나는 사람도 어둠도 말고 오로지 그 나무들만 무서웠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엔 나무마다 잔뜩 매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매미는 정말로 “맴맴”하고 운다는 것을, 참매미의 울음이 그 동네 모든 매미 떼창의 시작이라는 것을, 교복 입은 아이들이 자기들도 매미만큼이나 할 말이 많아 나무 기둥을 발로 걷어차면 30초 정도는 매미들도 기다려 준다는 점을 그 나무 아래서 배웠다.

재개발 되기 전 단지의 모습. 나무들이 아파트 4층 높이까지 뻗어 있다. 동아일보 DB


안타깝게도 재개발은 생각보다 더뎠다. 엄마는 처음엔 “너 대학 가면 방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보자” 하다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엔 “취직하면 방에 무엇무엇이 필요할 거야” 했지만, 내가 취직하고 독립 자금을 모을 때까지도 새집은 지어지지 않아 나는 끝내 그 집에 못 살았다.

반짝이는 새 집에서 지금 내 부모는 아주 잘 지낸다. 아빠는 자주 술에 취하고 그 많은 날 중 정말 가끔씩만 길었던 기다림을 얕게 후회 한다. 무엇을 기약하고, 기대하고, 오래 기다리면서 가족의 행복을 유지하는 게 부모로서는 꽤 고단했을 것 같다.

잘 짜여진 생은 틀림없이 비틀린다. 우리는 그때 누가 크게 아파서도 안 됐고, 돈 사고를 쳐서도 안 됐고, 뭘 당해서도 안 됐고, 비싼 취미를 만난다거나 꽃 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재능이 발견 되어서도 안 됐다. 이중 대부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몇몇은 실제로 벌어졌다. 굽이굽이 아찔했으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새로 올라간 아파트는 말하면 누구나 알 법한 대단지인 데다 커뮤니티 시설도 훌륭하다. 부모가 안온한 곳에 살아 주어 고맙다. 단지의 나무들은 다 키가 작다. 플라타너스 길이 무서웠지만 나무들이 지나치게 착해져서 약간은 무안하다. 그 많던 나무들은 누가 다 베었을까. 미련 없이 떠나온 동네인데도 내 유년의 풍경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어 솔직히 속상할 때도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지만 고향은 상실한 기분이다. 떠나올 때의 산뜻함이 조금 후회스럽다. 아마도 나는 이제 땅 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걸 그때는 몰랐다.

끝날 듯 말 듯한 여름, 밤 산책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당연히 엄마도 빨래나 설거지보단 가만히 있는 게 좋고, 더운 걸 싫어한다. 그리고 깜빡하지만 않는다면 한 번에 한 번씩(?) 꼬박꼬박 물을 내린다…. 엄만 종종 내게 전화해 “딸램아 에어컨 필터 잘 청소해서 틀어야 돼” 한다. 나는 “엄마 비 온다고 내내 창문 열어두지 말고 에어컨 한 시간이라도 틀어요. 습하면 힘들어” 한다. 이런 집에선 가만히 있으면 춥다. 설거지하던 당신과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내가, 각자의 거실에 추워하며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이상하다.

플라타너스의 그늘을 진작에 잃은 데다 여름은 해가 갈수록 맹렬해진다. 나는 고향도 여름도 빼앗겼다는 생각에 가끔 짜증이 난다. 그래도 세월이 내 부모 앞에 반짝이는 땅 하나를 남겨줬으니 회한은 참아진다. 내가 잠시 빌려 살았던 그 땅에서 그들이 창밖의 땡볕을 지루해할 생각을 하면, 늘 무언가를 무서워하며 살았던 젊은 내 부모가 떠올라 나는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