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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동유럽이라는 관념… 오래된 편견 부수기

입력 | 2024-08-17 01:40:00

냉전 시절 정치적 용어 ‘동유럽’… 폭력-가난 등 부정적 의미 담겨
종교-민족 등 14가지 키워드로, 역사적-문화적 다양성 재조명
◇굿바이, 동유럽/제이콥 미카노프스키 지음·허승철 옮김/500쪽·3만3000원·책과함께





동유럽은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서유럽 동쪽의 20여 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지리적 특징보다도 냉전 시절 공산권 국가들을 묶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돼 왔다. 또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낙후됐다는 이미지가 있어 멸칭(蔑稱)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소련이 사라진 뒤에는 실체적 개념마저 희미해졌다. 이제 체코, 슬로바키아 등은 자국을 ‘중유럽’으로 칭한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등 발트 국가들은 북방의 노르딕 국가로 인식되길 원한다. 이쯤 되면 폴란드계 미국인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다음처럼 도발적인 서두를 꺼내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 대한 역사다. 동유럽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동유럽이란 용어는 외부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만들어낸 말”이라며 “가난, 폭력, 민족 갈등 같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감추기 위해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전까지 동유럽 관련 책은 오스만, 합스부르크, 소련으로 이어지는 정복사 이야기를 다루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 민족, 전쟁 등 14가지 키워드를 내세우며 각 국가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우선 동유럽의 정체성을 ‘다양성’으로 정의한다.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약 1000년간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여러 민족과 언어, 종교가 혼재된 용광로가 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19세기 말 폴란드 에세이 작가 예지 스템포프스키의 예를 든다. 동유럽을 “가장 특이한 민족적 혼합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라고 칭한 스템포프스키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에서 시작해 몰도바를 거치는 드네스트르강 인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지주는 폴란드어를, 농민은 우크라이나어를, 관리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저자는 10분만 걸어가도 또 다른 언어권이 등장하는 이 같은 동유럽의 독특함을 보여주며 “동유럽의 모든 공동체는 혼합되지 않을 수 없고 ‘순수’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올 법한 딱딱한 이야기 대신 흥미로운 미시사도 가득하다. 동유럽에선 성탄절 후 늑대인간이 12일 동안 돌아다닌다는 미신이 있었다. 1692년 라트비아에선 티에스라는 노인이 ‘늑대인간’이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뒤 태형으로 사망한다. 엄격한 종교 분리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비극적인 이야기 등도 시선을 끈다.

이 책은 동유럽이 단순히 서유럽의 부속이 아닌 독립적이고 매력적인 문화를 가진 곳임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가 폴란드인 부모에게서 비롯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20년간 탐독한 자료들이 풍부히 녹아 있다. 역사를 다루면서도 에세이 형태의 무겁지 않은 문체를 써서 쉽게 읽힌다는 점도 매력이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일부를 점령하며 동유럽의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는 이때 지역적 배경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