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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한국 양궁 활의 비밀: 실패가 띄워 올린 ‘날개’의 비상(飛上)[유레카 모멘트]

입력 | 2024-08-17 08:00:00


그래 이거야! 풀리지 않는 과제,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 끝이 보이지 않는 역경을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솟아나는 상쾌한 아이디어.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한 모금 청량음료 같은 ‘유레카 모멘트’를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예삿일로 생각했다. 1995년 3월 처음으로 출시한 양궁 활 날개에 금이 간 것이 나온다는 보고였다. 쏘는 데 이상 없고 부러진 것도 아닌데…. 5월 소년체전 양궁 종목에 출전한 남녀 선수 150여 명 모두 우리 활을 들고 나왔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 박경래가 만든 활”이라는 입소문에 성능까지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으로 접어들며 ‘내 활도 실금이 났는데 네 활도?’라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몇 개를 수거해서 날개를 잘라 소재를 뜯어 보고 분석했다. 날개 제작에 쓰인 카본(탄소섬유) 문제라고 확신했다. 일본에 첫 수출로 활 50대를 선적한 직후였다. 고민은 깊어갔다. 박경래 대표(당시 39세)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활이 도착하면 포장 뜯지 말고 바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양궁 활 제조업체 윈앤윈을 설립한 지 2년여 만이었다.

● ‘45도 바이어스 카본’

양궁 경기에 쓰이는 리커브 활. 선수가 손에 쥔 부분은 핸들이며 그 양 옆으로 카이저 수염처럼 뻗은 것이 날개(limbs)다. 날개에는 다양한 최신 기술이 집적돼 있다. 윈앤윈 제공.


양궁 경기용 활(리커브 활)은 크게 핸들(손잡이)과 날개로 구성된다. 활시위를 매는 날개가 사실상 활의 성능을 좌우한다. 날개는 가볍고 강하며 탄력 있고 똑바로 휘어져야 한다. 삐딱하게 휘면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충분한 비거리를 확보하려면 화살 스피드가 좋아야 한다. 충격을 잘 흡수해 쏘는 순간 비틀리며 생기는 불량 운동이 적어야 한다. 정확성과 직결되며 집중력을 키운다. 잘못 쐈을 때 그 실수의 영향을 적게 받는 관용성도 좋아야 한다. 박 대표가 활을 만들기로 했을 때 가장 역점을 둔 것도 날개였다.

양궁 국가대표를 지내고 1984년, 28세 때부터 남자 국가대표 코치로 1985년 세계양궁선수권,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단체 금메달을 따낸 박 대표는 이름이 알려진 지도자였다. 회사를 세운 뒤 적절한 날개 재료를 찾아 인맥을 통해 수소문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6개월간 일본과 미국을 오갔다. 미국 호이트와 일본 야마하가 세계 리커브 활 시장을 양분할 때였다.

그가 찾은 곳은 도르래로 시위를 당기는 사냥용 활인 컴파운드 활 소재를 공급하는 미국 회사 ‘고든 카본’이었다. 미국 사냥용 활 시장 규모는 리커브 활 규모보다 훨씬 크다. 그 회사 사장은 컴파운드 활에 쓰려고 개발했다는 ‘45도 바이어스 카본’이라는 소재를 추천했다.

“활 날개는 실같이 쫙 늘어뜨린 카본 원사(原絲)를 수지(樹脂)로 코팅한 필름으로 만듭니다. 대략 원사가 70%, 수지가 30% 정도입니다. 문제가 뭐냐면 열과 압력으로 성형한 필름 결이 대나무처럼 한쪽으로만 돼 있어서 접으면 쉽게 빠개집니다. 그래서 필름을 수직(90도)과 수평(0도)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겹쳐 접착해서 쓰는 게 일반적이죠.”

45도 바이어스 카본은 필름을 45도로 겹친 것이었다. 시위를 당길 때 비틀림을 잡아주고, 쏠 때 충격으로 비틀어지는 현상도 줄어든다는 테스트 결과였다. 좋은 것을 추천받았다 싶었다. 하지만 회사 묻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1995년 말, 국내에 팔린 모든 활을 리콜했다. 활을 계속 만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로에 섰다. 창립 2년 6개월 만이었다.

● 가장 큰 실패, 그러나 터닝포인트


양궁 경기용 활 날개. 각각 핸들(손잡이) 위와 아래에 부착해 사용한다. 윈앤윈 제공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금이 간 활들을 분석했다. 날개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갈라지고 있었다. 활이 휘면서 45도 바이어스로 붙어 있는 필름과 필름 사이가 떨어져 유격(裕隔)이 생긴 것이다. 필름들을 붙잡아 주는 접착력이 문제였다. 도르래를 이용하기 때문에 리커브 활과는 달리 크게 휘어지지 않아도 힘과 속도가 나는 컴파운드 활을 생각해 제작한 결과였다.

접착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인 국도화학 연구팀에 의뢰했다. 하지만 접착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효능이 제각각이어서 바이어스 카본에 제격인 물질을 찾는 작업은 여의치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접착제나 수지, 페인트 같은 제품은 일본이 최고였다. 일본에서 발견한 접착제를 사용하자 유격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됐다.

일본 접착제는 비쌌다. 가성비(價性比)가 더 좋은 제품이어야 장기적으로 가격 경쟁력에 도움이 될 터였다. 스위스 회사이던 시바가이기(Ciba-Geygy) 접착제를 찾아냈다. 일제와 품질은 비슷하고 가격은 훨씬 나았다. 공급도 원활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때까지 박 대표 삶에서 가장 큰 실패였다. 지도자로서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을 석권했다. 목표였던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최고 위치까지 올랐지만 추락한 셈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순간이었다. 45도 바이어스 카본을 자체적으로 만들자고 결정했다. 당시 호이트나 야마하, 어느 회사도 바이어스 카본을 쓰지 않았다.

지금은 카본 필름을 직접 제작하지만 1995년에는 두루마리 필름을 수입해 활을 만들었다. 필름을 펼쳐 자른 다음 프레스에서 성형해 날개용 판을 만들었다. 고든 카본에서도 그런 필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45도 바이어스 판을 자체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45도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30도, 혹은 30도와 40도를 혼합하는 등 여러 가지 바이어스 패턴을 창안했다. 거듭된 테스트를 통해 접착력에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고 활 성능이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양궁 경기용 리커브 활 날개와 핸들에 사용되는 카본 소재. 실처럼 뽑히는 카본 원사가 프레스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필름 같은 원단이 되어 말리고 있다(왼쪽 사진부터). 윈앤윈 제공


“실패하는 바람에 우리 스스로 연구하게 됐습니다. 바이어스 패턴은 훨씬 발달하게 됐고요. 성능에 맞게 여러 형태로 패턴을 설계하고, 관련 특허도 여러 건 냈지요. 카본 패턴 설계는 가장 큰 노하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패는 정확하고 안정된 날개로 자리매김하는 터닝포인트였습니다.”

윈앤윈은 활 관련 특허가 46개(시효 끝난 것 포함)다. 세계에서 가장 많다. 대부분은 날개에 관한 것이다. 현재 세계 경기용 리커브 활 시장에서 윈앤윈에 이어 2위인 업체는 과거 1위였던 호이트다. 호이트는 2010년 윈앤윈 시장 점유율이 40%대로 치솟자 바이어스 카본을 전격 채택했다. 카본 패턴 설계를 따라온 것이다. 박 대표는 “우리가 신제품만 내면 제일 먼저 구입하는 데가 호이트”라며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 ‘비생산적인 도전이 문화를 낳는다’

1999년 어느 날, 짐 이스턴 당시 세계양궁연맹(WA)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스터 박, 당신네 공장을 구경하고 싶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스턴은 호이트 사장을 역임하는 세계 양궁계 거물이었다. 박 대표와는 서울 올림픽부터 국제대회 현장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다. 1998년 박 대표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양궁 박람회 ATA 쇼에 활 대여섯 대만 들고 혼자 참석했을 때 부스로 찾아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박 대표는 ‘뭘 보러 오려는 걸까. 우리 기계들은 기계라고도 할 수 없는데’라며 갸우뚱했다. 대부분 박 대표가 대략 설계하고 주로 서울 왕십리 공작업체에 의뢰해 만든 것들이었다.


짐 이스턴 전 세계양궁연맹 회장. 세계양궁연맹 홈페이지


당시 각국 선수들이 쓰던 호이트 활이 잘 부러진다는 소식이 잇달았다. 윈앤윈은 순풍을 타고 있었다. 실패를 딛고 자체 제작한 바이어스 카본 날개가 1997년 초 완성됐다. 1998년 경기용 활 시장을 노린 미국 사냥용 활 대기업 PSE와 주문자위탁생산(OEM) 계약을 맺었다. 정점은 1999년 7월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세계 400여 출전 선수 중 윈앤윈 활을 든 단 2명인 이은경, 홍성칠 선수가 남녀 개인전 금메달을 땄다. 박 대표는 국제심판으로 현장에서 감동을 맛봤다. 유럽에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경기 용인시 남사면에 있던 공장을 방문하고 간 이스턴 회장은 얼마 뒤 호이트 공장장을 데리고 한 번 더 보러 왔다. 곧이어 야마하에서도 견학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야마하 활은 정밀성이 떨어져 쏠 때 덜덜 떨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공장을 견학한 이스턴 회장과 야마하 측이 감탄한 것은 ‘에어(공기) 접착’을 비롯한 날개 가공 공정이었다.

완만한 각의 곡선 형태인 날개는 위와 아래 금형(금속 거푸집) 사이에 접착제를 칠하고 속대가 되는 소재와 카본을 여러 겹 넣은 뒤 열판을 올리고 프레스로 눌러 만든다. 문제는 압력을 수직으로 받는 날개 중심과 빗겨서 받는 날개 끝부분 접착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 경우 끝부분이 부러질 확률이 높다. 접착 상태가 다르면 접착 강도와 관계없이 부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정 접착 강도가 10이라면 날개 전체가 고르게 10이어야 한다. 끝부분이 15고 중심이 20이라면 접착 강도는 모두 10을 넘지만 부러질 가능성이 크다.

날개 전체가 고른 압력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론적으로는 날개를 대여섯 부분으로 나누고 그 위에 프레스를 각각 별도로 둬서 모두 수직 방향으로 일제히 누르면 된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들고 설치가 복잡하다.

박 대표가 시행착오 끝에 고안한 아이디어는 이랬다. 프레스와 금형 사이에 공기를 주입한 튜브를 넣어 고정한다. 프레스로 누르면 튜브가 펴지며 날개를 감싸안 듯 전체적으로 고르게 압력을 가하게 된다. 튜브로는 소방호스를 활용했다. 박 대표 말에 따르면 “별 것 아닌,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에어 접착을 포함해 윈앤윈 날개 가공 공정은 30개 정도다. 호이트나 야마하가 약 15개인 것과 대비된다. 하나의 공정을 둘로 나눠 꼼꼼히 작업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정을 거치는 데 오래 걸린다. 생산성은 불리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밀성이라는 얘기다.

이후 호이트 활의 품질은 많이 좋아졌다. 박 대표는 “지금은 절대로 안 보여 준다”고 웃으며 말한다.

● “위기감도 동력이 된다”


박경래 윈앤윈 대표가 8일 경기 안성시 본사 사무실에서 그동안 만들어 온 양궁 경기용 활 날개와 핸들 앞에 섰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이 회사가 최초로 개발한 카본 핸들이다. 안성=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내가 경기용 활을 안 만드는 이유가 뭔지 아나.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선수들이 쓰지 않아.”
박 대표가 막 경기용 리커브 활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만난 국내 활 제작업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무로 된 전통 리커브 활이나 초보자용 리커브 활을 제작해 유럽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당시 한국에는 이런 업체가 서너 개 있었다. 지금은 모두 중국으로 넘어갔다. 박 대표는 “경기용 활 제작이 그렇게나 어려운데 지금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도로스(외항선원)를 꿈꾸던 부산의 고등학생은 교내 클럽 활동으로 하던 양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학년 2학기 때였다. 1974년 양궁 종합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6개나 기록하며 남자부 전 종목을 석권하며 신문에 나왔다. 동아대가 그 때문에 양궁팀을 창단했고, 고교 교장선생님은 “니는 신궁(神弓)이다”라며 부추겼다. 해양대에 가려던 학생은 동아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1975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하지만 메달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남자 대표팀은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스로 신궁이라 믿고 선수로 대성하겠다는 뜻은 좌절됐다. 그는 코치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으로 목표는 달성했다. ‘지도자로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990년 미국 양궁협회 초청으로 애리조나주립대에서 미국 양궁 지도자 400여 명에게 한국 남자 양궁의 성공 방법에 대해 4시간 동안 강의했다.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내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됐다. 목표를 달성한 거야. 그럼 이제 나는 지도자가 아니구나.’ 선수들을 지도하기가, 운동장에 나서기가 싫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것과 활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겹쳤다. 남자 대표팀 코치로 198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의 13연패(連霸)를 끊고 단체 금메달을 딸 때가 29세였다. 한참 젊었다. 지도자를 계속하기에도 젊은 나이였다.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뭔가를 해야 했다. 잘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하다 1991년 어느 날 활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어 바로 사표를 냈다. 계획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자신감이 너무 충만해 있었던 거였어요. 뭐든지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지도자로서 목표한 걸 이루면서 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던 겁니다. 활을 보면서 충분히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확실히 있었습니다. 자신도 있고 확신도 있고. ‘또라이’의 절정이었죠.”
그러나 창업한 지 2년 만에 실패를 맛보고 1996년 초까지 후회도 많이 했다. ‘활 만드는 일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자신감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 오직 자신감 하나만 가지고 겁 없이 시작했다면, 이제는 절박감, 위기감이 그를 이끌었다. “위기감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방법이 반드시 생기는 것 같아요. 위기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동력이 됐던 것 같습니다.”

박 대표는 10년 전 활에 쓰이는 카본 기술을 활용해 자전거 시장에 뛰어들었다. 훗날 종합 스포츠용품 기업을 그리고 있다. 선진국이라면 자국 스포츠 브랜드는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스포츠용품은 스포츠인이어야 잘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자신 있어 보인다. “활을 만들기 시작할 때도 리커브 활 시장을 얼마나 점유하겠다는 것보다 호이트나 야마하보다 더 좋은 활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맞아떨어진 거죠. 자전거나 다른 스포츠용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