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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의 오페라… 그것은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아니었다

입력 | 2024-08-19 10:53:00

유럽 대표 야외오페라 3곳 현장 관람
브레겐츠 페스티벌서 기존 원작 뒤집어
악마가 주인공들 조종하고 음악도 편집
베로나 ‘아이다’ 지휘자 오렌 기량 빛나
푸치니 페스티벌 ‘토스카’ 테너 로이 주목




브레겐츠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 2막. 남주인공 막스가 악마 자미엘이 해골 말을 타고 모는 마차에 타고 있다. 연출가인 필립 스퇼츨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이 자미엘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는 전제 위에 줄거리를 엮어 나갔다. / 브레겐츠 페스티벌 홈페이지 ⓒAnja Koehler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1821)에서 여주인공 아가테는 “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태양은 그 위에 빛난다”며 “그곳은 맹목의 우연(blindem Zufall)을 받들지 않고 거룩한 의지(heiliger Wille)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노래한다. ‘우연’과 ‘의지’의 대비는 게르만 부족사회에서 유래한 자연신적, 주술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유일신적 세계관 사이의 대립을 상징한다.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의 호숫가 무대에서 지난달 16일 공개된 브레겐츠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의 ‘마탄의 사수’는 거룩한 의지의 승리를 노래한 원작을 뒤집었다. 이달 11일 브레겐츠 현장에서 이 작품을 관람했다. 원작에서 2막의 마술탄환 제조 장면에만 등장하는 악마 자미엘은 이번 무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누비며 주인공들의 행위를 조종했다. 마치 ‘이 지상은 마성과 맹목의 우연이 지배하는 곳’임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파격적인 무대를 탄생시킨 주인공은 TV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에서 전방위로 활약해온 연출가 필립 슈퇼츨이었다. 2021년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베르디 ‘리골레토’로 화제를 몰고 왔던 그는 이번 무대에도 수많은 서커스적 장치를 끌어들였다. 원형의 불길이 물속에서 악당 카스파르를 둘러싸고, 악마는 해골로 된 말과 마차를 달린다. 여주인공 아가테는 기울어진 침대에서 히스테리에 시달린다.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고 교회탑이 폭발한다.

이런 정도까지는 미리 예상할만한 슈퇼츨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발짝 더 나갔다. 첫 부분부터 총 맞은 아가테와 교수형당하는 남주인공 막스를 보여준다. 이후 극은 일종의 ‘플래시백’이 되고, 끝부분에서 연출가는, 또는 악마 자미엘은 처음에 제시한 결말을 스스로 철회한다. 그 모든 과정이 악마의 계획과 지배 아래 이뤄지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악마 자미엘이 무대를 끌고 가는 만큼 원작에 대한 조롱은 피할 수 없다. 아가테의 친구 엔헨은 레즈비언으로 설정되었고, 막스는 사냥꾼이 아닌 마을 서기(書記)가 된다. 원작에서 경건의 상징과도 같았던 순결한 아가테는 막스의 아기를 가진다. 베버의 음악이 그려내는 경건함은 ‘불경한’ 미장센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는다. 그런 마찰음도 연출가의 성과라면 성과다.

20세기 중반 이후 노골화된 급진적 연출 경향 ‘레지테아터’(Regietheater)’는 기존 오페라의 배경은 물론 기본적 플롯까지 뒤집어 왔다. 이번 ‘마탄의 사수’에선 음악에까지 칼날이 가해졌다. 서곡부터 주인공 막스와 아가테의 중요 아리아들은 중간이 뚝 잘린 채 그 사이에 새롭게 창작된 대사들이 삽입됐다. 무대 오른쪽에는 첼로와 하르모늄(풍금과 비슷한 건반악기), 타악기로 구성된 밴드가 새로 창작된 민속풍 선율을 연주했다.

이런 공연물을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변용해 만든 새 장르의 공연물’임을 표방하는 것이 나을 것처럼 보였다. 이번 공연의 성격은 슈베르트 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편집한 한스 젠더의 음악극 ‘겨울 나그네’와 비교할 만했다. 삽입된 민속 선율의 느낌도 젠더의 음악극과 비슷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마탄의 사수’는 17일까지 공연됐고 내년 7~8월로 이어진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 2막. 남주인공 막스가 악마 자미엘이 해골 말을 타고 모는 마차에 타고 있다. 연출가인 필립 스퇼츨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이 자미엘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는 전제 위에 줄거리를 엮어 나갔다. / 브레겐츠 페스티벌 홈페이지 ⓒAnja Koehler

이 공연에 앞서 9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토레델라고에서 열린 푸치니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의 ‘토스카’를 관람했다. 높은 해상도에 치중한 흑백의 프로젝션 장치는 무대 위에 실제 입체 설치물을 구현한 듯한 효과를 주었다. 카바라도시역 테너 알레한드로 로이는 또렷하고 맑은 서정적 테너와 드라마티코(극적) 테너를 오가는 발성으로 배역에 몰입감을 선사했다. 토스카역 소프라노 에리카 그리말디는 평소의 ‘날이 선’ 토스카보다 힘이 떨어지는 모습을 나타냈다. 스카르피아 역 에르빈 슈로트는 전형적인 악역으로는 음성이 밝은 편이었지만 절묘한 강약의 배합과 공들인 연기로 갈채를 받았다.

10일 이탈리아 베로나 야외극장에서는 1913년 이곳에서 열린 베르디 ‘아이다’ 공연을 오마주한 ‘아이다 1913’ 공연이 열렸다. 기존의 익숙한 ‘아이다’에 비해 약하게 설정된 조명과 다양한 색감의 무대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다메스 역 테너 표트르 베차와의 영웅적이고 또렷한 음성은 무대를 사로잡았다. 반면 아이다 역 마리아 호세 시리는 음성연기와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 모두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지휘자 다니엘 오렌의 원숙한 무대 장악력은 2005년 베로나에서 처음 관람한 ‘아이다’에서처럼 여전히 경탄스러웠다. 오렌은 10월 12~19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2024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공연을 지휘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