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건국절 추진 들어본 적도 없는데 광복절 기념식 파탄 낸 광복회장 식민지배 한가운데서 건국 주장에서 일제 때도 나라 잃은 적 없다는 주장으로
송평인 논설위원
이종찬 광복회장이 실체 없는 건국절 추진을 문제 삼아 광복절 기념식을 파탄 내는 걸 보면서 착잡했다.
나로서는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지난해 9월 6일자 ‘홍범도가 본 홍범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이 맘 놓고 숨쉴 땅 한 자락 없었는데도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고 쓴 데 대해 이 회장은 광복회 홍보조직까지 동원해서 나를 1948년 건국론자로 몰아붙이며 성토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었다는 평범한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지, 또 그런 주장이 어떻게 1948년 건국론으로 연결되는지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8년 전인 2016년 9월 7일자 ‘건국절은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선진국 중에 건국절이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고, 광복절이 있으면 됐지 건국절까지 필요할지 의문이고, 건국 시점(時點)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 보면 국민국가(nation-state)의 핵심인 국민통합(nation-building)의 과제를 소홀히 하기 쉽고, 굳이 건국절을 정한다면 한반도 전체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후에 하면 어떠냐는 논리로 1948년 건국절 추진에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했다. 그런 내가 졸지에 1948년 건국론자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이 회장이 수가 틀리면 실체도 확인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는 성급함이 있지 않은가 진즉 생각하게 됐다.
이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따라 1919년 건국을 주장하다가 일제강점기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일제 식민지배의 한가운데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하려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라를 잃은 적은 없고 단지 나라의 정체(政體)만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듯이 억지도 그렇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잃었나요, 안 잃었나요’라고 물어보니 다 ‘나라를 잃었다’고 대답한다. 멀쩡한 사람이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 회장이 스스로 식민지배하에 있는 나라의 존속 여부에 대해 세계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전문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이철우 연세대 국제법 교수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학문의 학문인 철학에서 현대 정신을 대표하는 후설에 따르면 학자라고 해서 전문가의 일방적 권위로 함부로 일상세계(Lebenswelt·everyday life)의 의식을 식민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학술대회의 한구석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특이한 의견에 기대 광복회장이 국가의 공식 행사인 광복절 기념식을 쪼갠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다.
이 회장이 이명박 정부 시절 건국 60주년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위촉됐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갔다고 반박하지만 대통령이 위촉하는 고문이 그렇게 허술하게 됐을까 의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제2건국’의 과욕을 부리다가도 199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 50년’이란 표현을 썼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구나 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니 딱히 부끄러워할 건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